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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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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03월 121호
설날 기분은 뭐니뭐니해도 정월 초하룻날이어야 제대로 난다. 마음까지도 그렇게 느껴진다. 비로소 한 해를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한 살 더 먹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내 한 해의 도정道程을 점검하는 날이다. 묵은 해와 새 해가 따로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설날 아침에는 한 해의 첫날이라는 느낌 때문에 다른 날보다 졸음이 덜했다. 새벽 도량석 소리에 잠이 말끔이 깨었다. 평소에 잠이 깨기 싫어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하던 세면도 비누칠을 하여 씻고 나니 정신이 환하게 맑아 왔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육체는 길들여지는가 싶었다. 법당에 대중 스님네가 다 모여 예불 끝에 통알을 마쳤다. 맨머리가 시릴 정도로 새벽 기운이 차가웠다. 먼저 제불 보살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보, 승보, 사부 대중에게 각 삼배씩을 하였다. 산중의 어른 스님네도 모처럼 자리를 하셨다. 대중 모두가 어른 스님께 세배를 올렸다. 판각板閣을 비롯하여 각 법당을 돌며 참배하고 나니 아침 공양전에 할 일은 다 마친 것 같았다. \"작년에 보고 처음이니 꼭 일 년 만이네요.\" 아침에 떡국을 먹으며 하룻밤 사이에 많은 게 달라졌다고 농담을 했다. 어둑어둑한 정초날 새벽, 버섯을 넣어 끓인 떡국이 유별나게 구미를 돋우었다. 공양 뒤에 산중 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드리는 일도 즐거운 일 가운데에 하나. 어제 저녁, 윷놀이를 즐기는 떠들썩한 소리가 산중에 가득했다. 그믐날에는 그냥 밤을 지새는 게 아니란다. 자정까지 윷을 놀았다. 학인 스님들이 삼경이 지나 왁자지껄 떠들어도 이날 그믐밤만은 어른 스님네들도 모른 척 봐주신다. 오히려 힘차게 윷을 노는 학인들을 보고 흐뭇해 하시는 게다. \"그믐날 밤인데 왜 이렇게 조용해!\" 너무 조용하면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명절 때에는 시끌벅적 윷을 던지는 소리가 나야 제맛이 나고, 아무래도 모여 사는 기분이 제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원에서도 이 날은 좌복을 걷어내고 윷판을 만들어 선방이 떠나갈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학인 스님네는 현당 큰방에 여기저기 패를 갈라 윷놀이를 하였다. 서로 이기라고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지른다. 윷이 떨어질 때마다 박수가 나오고 와 하는 함성이 터지고는 한다. 그 소리에 온통 혼이 빠질 지경이다. 모두가 순수하게 몰입하는 게 참 좋아 보였다. 가끔 노스님들이 지나다 보시고 빙그레 웃기만 하시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산중은 설날을 하루 앞둔 그믐날 밤이면 윷노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진다. 새해 첫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중노릇은 딴 곳에 정신 팔지 말고 성불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올해의 큰일은 바로 성불하는 일인 게야.\"
극락전에 계시는 노스님은 세배를 마친 내게 이렇게 경책의 말씀을 하셨다. 내 밝은 마음이 전해진 까닭일까. 만나는 스님네마다 합장을 하고 새해인사를 건넸다. 안거 기간이라 산중에서 정초를 지내는 스님네가 많아 명절 기분이 몇 배 더 난다. 모두의 밝은 표정을 보고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몇몇 분들께 연하장을 보내면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내일은 오늘처럼 사소서\' 오후에는 거창에 계시는 주중식, 송정옥 선생님 댁에서 차 한잔을 나누었다.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두 분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참으로 부담없는 사람들이다. 두 분에게서 배우는 게 많다. 꼭 절집안에만 스승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먼저 그분들의 생활 정신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내 수행자 정신은 빈 껍데기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만든다. 수질 오염을 염려하여 머리를 감을 때에는 꼭 비누를 쓰고, 헹굴 때에는 식초를 타서 감는다. 누구나 걱정을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쉽게 이러한 것들을 외면하고 만다. \"먹고 남은 차 찌꺼기를 타서 머리를 헹구면 머리가 부드러워지고 윤기가 흘러요.\" 내일부터 그렇게 한 번 해 보겠다며 좋아라 하신다. 참 진실하게 사시는 분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이 아니면서도 편리한 삶을 꾸려나간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지난 번 찻물을 끓일 때는 시꺼멓게 때가 끼고 찌그러진 주전자를 사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전기 포트를 새로 구입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물이 끓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스탠드 역시 많이 낡아 보였다. 십 년은 족히 넘게 사용한 듯 싶었다. 이 집은 낡아서 버리는 게 없다. 불편하지 않으면 계속 사용한다. 돈이 없어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언젠가 내게 우편물이 보내져 왔을 때 난 무척 놀랬다. 이미 보낸 봉투를 두 번씩 사용하였다. 저쪽에서 보낸 주소를 지우고 뒷쪽에다 주소를 적어 다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아무렇게나 정재淨財를 낭비하는 내 일상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하였다. 한 번 들를 때마다 한 가지씩 배우고 오는 셈이다. 올해도 이런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