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자비_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2년 03월 121호
어떠한 고苦라도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의 질문을 받아들여,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문품은 시작한다.
\"선남자야. 만약 무량 백천만억 중생이 있어 온갖 고뇌를 받는다 해도, 이 관세음보살 있음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 부른다면, 관세음보살이 그 이름 알아들어 다 고뇌에서 풀려나게 하느니라\"
그러고는 소위 칠난七難과 관련시켜 설해 가셨는데, 먼저 화난火難과 수난水難을 첫째와 둘째로 문제삼으셨다.
\"만약 이 관세음보살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설사 큰 불속에 들어간 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나니, 이 보살의 위신력 때문이며, 만약 큰 물에 표류한 대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데 닿게 되며......\"
이 대목에서 혹은 머리를 갸우뚱할 독자도 있을는지 모른다. 불길에 싸인 사람도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예외없이 그 재앙에서 벗어난다는 일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물에 빠졌을 경우에도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물과 불을 자연물의 그것으로만 보고 있는 데서 오는 의혹이다. 만약 그런 것에 국한시킨다면 일반 사람은 물불의 재앙과는 무관한 채 얼마든지 일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이 말씀하고 계신 불은 생사의 불꽃 바로 그것이매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요, 물에서의 표류 또한 번뇌와 생사에 떠밀려 가고 있는 양상인 터이므로 우리 자신의 현존재 바로 그것임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에 일신을 내던질 때, 고苦로써의 이같은 한계상황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해야 한다.
셋째는 풍난風難인데, 바다에 들어갔다가 설사 태풍이 그 배에 불어닥쳐 나찰귀羅刹鬼의 나라에 닿게 된 대도, 이 보살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는 우적于이라는 당나라 재상과 자옥선사紫玉禪師 사이의 문답이 전해온다.
\"태풍이 몰아 닥쳐 나찰귀의 나라에 닿게 된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천해 빠진 우적아, 너는 기껏 이런 것을 묻는구나.\"
이에 우적의 안색이 홱 바뀌자, 자옥선사는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나찰귀의 나라에 닿게 되는 일이요.\"
이것으로도 드러나듯, 이 풍난은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악귀로 바꾸고 마는 진심瞋心바로 그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도장난刀杖難이니,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내려치는 무기가 토막토막 부서져 버려 죽음을 모면하는 결과가 됨을 이른다. 이 무기에 의한 위난도 반드시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에 국한시킬 일이 아니라, 우리는 평상시에도 늘 외부의 핍박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는 감각 기관을 통해 마음 안에 들어와 이를 쓰러뜨리고 짓밟고 때리고 걷어차고 찌르고 벤다. 결국 외부세계(六境)의 끊임없는 가해로 인해 우리의 불성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이 된다.
다섯째는 나찰난羅刹難이니, 야차와 나찰이 떼지어 몰려와서 해치려 해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해치지 못함을 가리킨다. 이는 번뇌의 비유일 것이다.
여섯째는 가쇄난枷鎖難이니, 경에서는 \'수갑과 착고와 칼과 쇠줄이 그 몸을 묶어 놓았다 해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모두 끊기고 부서지고 해 곧 이에서 벗어나지며\'라 표현되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구속되어 있는 상황을 이른 것이어서, 실을 뽑아 제가 저를 가두는 누에처럼 자기가 일으킨 번뇌로 자신을 꽁꽁 묶어놓는 상태다.
일곱째는 원적난怨賊難이니, 보물을 지닌 상인들이 도둑떼가 판치고 있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화를 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도둑도 번뇌를 가리킨다 보아야 하므로 나찰난의 그것과 구별이 애매하나, 나찰은 악이 두드러진 점에서 견혹(사상적 번뇌)을 가리키고, 이것은 악의 힘이 미약한 터이므로 사혹(감정의 번뇌)을 가리킨다고 봄이 어떨까 한다.
요컨대 일곱 가지 모두가 바로 우리들 자신의 현존재에 얽힌 상황임이 되는 바, 칼로 내려치는데 상투 속의 관음상에 칼날이 맞아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따위의 칠난에 얽힌 여러 영험담 같은 것은, 전면적으로 부정할 것은 아닌지는 몰라도 도리어 정곡에서는 벗어난 해석이라 할 것이다.
자재히 몸 나투어
앞의 칠난은 결국 어떠한 고에서라도 신심 있는 중생은 다 구해 주신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온갖 고에서 구제하기 위해 관세음보살은 어떤 신변神變을 나타내시는가. 이에 \'부처님의 몸으로 제도할 자란 관음보살이 곧 부처님의 몸 나투어 법을 설하며,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할 자란 곧 벽지불의 몸 나투어 법을 설하며, 성문의 몸으로 제도할 자란 곧 성문의 몸 나투어 법을 설하며라고 한 세 성자와, 제석천 따위 여섯 천왕과, 소왕小王과 장자長者 따위 다섯 가지 사람과,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사부대중과, 장자·거사·바라문의 아내인 네 종류의 부녀와, 소년·소녀 따위 두 어린이와, 천룡天龍 따위 팔부八部와, 집금강신執金剛神의 몸을 나타내 법을 설한다\' 밝히셨으니,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삼십삼신三十三身이다. 이 삼십삼신은 꼭 서른세 가지 몸으로 못박을 일도 아니어서 요컨대 경우에 맞추어 무수한 몸을 나타내신다는 말이겠으나, 그 어떤 몸을 나타내는 경우건 반드시 \'법을 설하며\'라고 되어 있어서, 깊이 법과 연관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러면 이 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러 몸을 때에 따라 자재히 나타냄이 중생의 근기를 고려한 조처였다면, 그때에 설해지는 법 또한 중생의 근기에 맞춘 방편의 가르침일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그 나투신 몸으로 미루어볼 때 삼승三乘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어서, 지옥과 아귀에서 보살에 이르는 온갖 근기에 적응하여 설해지는 가르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떤 근기에나 적응해 설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겠는가. 처음부터 방편의 하나밖에는 알지 못하는 지혜라면 방편의 법을 진실인 듯 착각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런 것에서 무한히 대처할 능력이 나올 리 없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은 절대적 진실을 실현하고 계셨고, 그러기에 그 지혜로부터 무수한 방편이 의식함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일불승의 진실에 서 계셨기에 방편을 설해 교화하신 것과 성질에 있어 같아지니, 그 구경의 목표 또한 방편을 진실에 돌아가게 하는 점에서 일치할 것인즉, 이 관세음보살이야말로 법화행자의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 말은 관세음보살의 크신 능력을 찬탄함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관세음보살의 손이 되고 발이 된 끝에 드디어는 관세음보살 자체가 되어야 할 것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니, 이런 서원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바른 관음 신앙임은 되지 않을 것이다.
흔히 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하는 데 대해 관세음보살은 대비大悲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부처님의 한 측면씩을 인격화했다고 여겨지는 점에서 십분 납득이 가는 견해이나, 자비가 결여된 지혜라면 진정한 지혜이지 못하듯이, 지혜를 떠난 자비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보문품은 반야심경과 다르지 않아서 저 반야심경에 나타난 투철한 지혜에서 나온 대자대비가 이 보문품이요, 이 보문품에 넘치고 있는 대자대비의 본체가 저 반야심경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질 때는 개권현실과 개근현원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것인 반야심경을 보문품과 관련시킴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므로, 법화경에서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의 지혜요, 그런 가르침을 설하신 부처님의 심정을 한 품으로 응집해놓은 것이 이 보문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그 끝없는 대자대비로 하여 우리에게 가장 친근감을 주는 보살이시다. 그만큼 관세음보살을 받드는 이도 많으나, 무슨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보살쯤으로 알아 그 자비의 또다른 일면인 지혜쪽을 간과하는 일이 있다면, 모처럼의 관음신앙도 절름발이가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