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재 이하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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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불교 - 일지
1992년 03월 121호
귀鬼란 무엇인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천부적인 재능을 쏟아부은 이백사십여 수의 시를 남기고 요절한 이하李賀(791∼817). 그는 중국의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매우 특이한 시인이다. 송대의 전이錢易는 그의 남부신서南部新書에서 \"이백은 천재天才, 백거이는 인재人才, 이하는 귀재鬼才\"라고 썼다.
귀鬼란 무엇인가? 귀鬼는 사자死者, 도저히 풀 길 없는 삶의 우수를 품은 망령을 의미한다. 따라서 귀재란 음울한 귀기가 서린 인간, 저승과 이승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떠도는 이상감각을 지닌 인간이다. 불교쪽에서 보면 귀란 길을 잃고 해매는 망령 또는 그러한 이상 상태에 사로잡힌 존재……그래서 귀는 붓다의 길을 동경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서성거리지만 결코 붓다의 길을 가지 않는 아니, 갈 수 없는 슬픈 존재이다. 귀재 이하 또한 능가경을 읽고 붓다의 길을 마주쳤으나 발길을 돌렸다. 그는 시인의 길을, 도가적인 낙원에 도달하는 길을 택했다. 우리는 이하의 문학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이 도달하는 세계가 또 얼마나 다른 틀을 보여 줄 수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귀재 이하, 그는 죽은 미녀를 사모하고 한밤중의 환상적인 묘지 풍경을그린다. 원래 중국 문학은 몽환적인 이미지 창조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여러 가지 체험을 주제로 하여 인생을 바라보고 있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이하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고립되어 있는 작품 세계를 가진 시인이면서도 가장 주목받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색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그 색채어를 결코 사실적으로 구사하지 않고 항상 색채어와 감각어를 자유롭게 합성시킨 몽환적夢幻的인 상징어를 만들어 낸다. 그런만큼 이하는 초사와 불교, 양대梁代의 궁체宮體 도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유미주의적 경향이 짙다.
능가경楞伽經은 책상머리에 쌓여 있고
이하의 자字는 장길長吉. 그가 태어난 곳은 하남성 낙양시 서쪽에서 약 오십 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복창현福昌縣 내의 창곡昌谷. 유년기부터 시작詩作을 익힌 이하는 807년 당시 국자박사였던 한유를 방문한다. 무명의 소년 시인이 국립대학의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마침 내객들을 전송하고 돌아온 한유는 피곤했다. 그래서 열일곱살 난 풋내기 시인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다. 그러나 문인이 들고 온 이하의 시인 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의 첫 구절 \"흑운黑雲은 성을 눌러 성벽이 무너질 듯, 금빛 비늘 반짝이는 달빛 속의 갑옷\"을 읽은 한유는 옷차림을 고치며 이하를 맞아들였다. 이하의 재능을 인정한 한유는 810년 낙양 지구 관리 채용 시험 예선에 합격한 이하는 진사 시험에 유자격자로 추천한다. 이해 겨울 스물한살의 이하는 희망에 가득차서 장안으로 향한다.
당대 지식인들의 유일한 생계는 관리로 입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하는 뜻밖에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부친의 이름이 진숙晋肅이므로 아들은 진사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이의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관리 시험의 답안에서조차 부친의 이름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당대의 예법이었다. 수험자는 부친이나 선조의 휘諱와 같은 문자가 출제되면 급병을 핑계대고 귀향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이하의 후원자 한유는 휘변諱辨을 작성 \"만약 부친의 이름이 인仁이라면 아들은 인人이 아닌가……이하를 시기하는 자들의 헐뜯음일뿐이다\"라고 이하를 변호했다. 그러나 이하는 결국 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당대의 관리 임용 제도로서는 진사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관료나 정치가로서 입신할 수 없었다. 생애를 좌우하는 시험에서 심리적 타격을 받고 절망한 이하는 811년 봄 다시 장안으로 나왔다. 그리고 명문의자제들을 위한 특별 임용 시험 제도에 의해 봉례랑으로 채용된다. 봉례랑은 군신의 판위版位를 관리하는 종구품의 미관말직. 이하는 자신의 절망을 이렇게 읊었다.
장안의 한 젊은이
스무살에 마음은 벌써 늙어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여 있고
초사도 손에서 놓지 못하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녘엔 애오라지 기울이는 술잔
지금 벌써 길은 막혀
……중략……
하늘의 눈은 어느 때 열려
고검古劍 한번 크게 울어 볼까
「贈陳商」
내면의 평화를 누릴 수 없었던 시인은 초세간적사유를 통해 인생을 바라본다. 시인은 입신양명을 꿈꾸면서도 불노장생과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우주적인 이법을 체득한 신선의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나 불교쪽에서 보면 불노장생의 꿈도,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우주적인 이법의 체득도 모두 허망한 환술일 뿐, 생존의 미망에서부터의 해탈 곧 오염된 사념의 싸이클에서의 자유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시인의 몽환은 더욱 깊어지고 고주단苦晝短, 진왕음주秦王飮酒, 신현神絃, 신현곡神絃曲, 남산전중행南山田中行, 추래秋來, 감풍感諷과 같은 귀기어린 시가 씌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합류할 수 없는 세속적인 현실에 격렬히 반항하는 반전통주의자의 눈으로 시를 쓴다. 장안에서 삼년을 보낸 이하는 813년 스물세살 나던 해 봄, 실의에 빠져 봉례랑을 사직하고 고향 창곡으로 돌아온다. 이미 시인의 건강은 죽음의 검은 장막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병약해진 심신을 추스려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자신의 실의를 이렇게 적었다.
아우와 헤어진 지 삼년
집에 돌아온 지 하루
녹색의 술잔과
읽던 책들은 예전 그대로이건만
병든 몸 아직 살아 있으니
세상에 무슨 일인들 없으랴
우마牛馬를 물을 필요 어디 있으리
이미 내던진 주사위에 모든 것
맡겼거늘
「시제示弟」
그리고 시인은 문학적 집념을 불태우며 자신의 절망을 한층 명료하게 다듬어 간다. 그러나 시인은 뜰안에 선 나무, 남창南窓의 달에서조차 고독을 느낀다.
뜰안에 나무심지 말지니
심어 놓으면 일년사시 근심이네
홀로 자는 남창南窓 침상 위의 달
올가을도 지난 가을과 같아라
생활의 실의 그리고 죽음을 예감한 이하의 영혼에는 절망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이 절망의 가시는 항상 어디서든 시인의 영혼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817년 이 망명신선亡命神仙은 눈을 감는다. 두보가 말했던가? \"시는 시인의 운명이 완성되는 것을 증오한다\"라고……
번뇌의 대백과사전
이하는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여 있고\"라는 자신의 시구처럼 능가경을 읽었다. 그러나 이하는 능가경이 설하는 무아·무분별·자각성지의 심법을 완성하지 않았다. 옛동양의 지식인들은 주로 화엄경과 금강경 그리고 능가경을 통해서 불교의 우주를 이해한다. 특히 능가경은 선불교의 사상적 지침으로써 널리 읽힌 경전이었다. 백거이 또한 \"인간의 슬픔을 다스릴 수 있는 약이 어디 있으랴? 오직 능가경 네 권이 있을뿐\"이라는 시구를 남기고 있다.
이하가 살다 간 시기의 중국 불교계에는 화엄과 선이 장려한 무한대사유의 세계를 꽃피우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삶을 우주적인 샹들리에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즉 모든 생명들이 서로 지혜와 자비의 빛을 교차시키면서 광대한 화해를 이루는 화엄적 인간 해석이 이미 정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시인 이하 역시 자기 시대의 불교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불교의 길을 다 가지는 않았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허망한 세계의 표상들을 다 읽고 몽환적인 슬픔으로 얼룩진 시가들을 남기면서도 결국 다른 길을 걸었다.
그가 다다른 길은 삶도 죽음도, 시간의 구별도 없는 도가적인 낙원이었다. 능가경의 불교는 적극적이면서도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한 해탈을 설한다. 그러나 이하의 경우 그의 이상감각과 귀기 때문에 이 적극적인 자기 부정을 완전히 실현할 수가 없었던 능가경은 단지 번뇌의 대백과사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눈에 비친 불교란 너무 행복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하의 백옥루白玉樓
한 인간의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완결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한 인간의 운명은 죽음에 의해서 해석된다.
이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가 열망하던 도가적인 낙원을 대변한다. 이상은이 적은 이하소전은 도가적인 영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하가 불교와는 다른 그 무엇을 얼마나 강하게 동경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숨을 거둘 무렵의 이하, 대낮에 홀연히 붉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규룡叫龍을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태고의 전문과 벽력석문霹靂石文으로 쓴 서판을 가져와 이하에게 보였다. 이하는 마저 읽지도 못하고 급히 걸상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미가 늙고 병들었으니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천제께서 백옥루를 세우시고 그대를 불러 기記를 새기고자 하노라. 천상은 즐거워서 고통이 없느니라!\"
이에 이하느 홀로 울었다. 이를 주변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잠시 후 이하는 기절했다. 그때 이하가 항상 사용하던 창에는 연기가 갑자기 피어올랐으며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하의 모친, 사람들의 곡哭을 급히 멈추게 하고 오두五斗의 밥을 지었을 때 이하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왕씨王氏 집으로 시집간 이하의 누이는 장길長吉의 일을 지어 낼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본 바가 이러했던 것이다.
세상의 혼란과 오염에 절망하던 이하의 유토피아는 눈부시게 하얀 옥으로 깎아 세운 누각이었다.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마이트레야의 비로자나장엄장각대누각을 찾아갔듯이 이하는 엄숙히 빛나는 천상의 백옥루를 찾은 것이다.
하늘은 이하에게 시재詩才를 주고 대신 그의 인생을 앗아갔다. 때문에 이하의 개인적인 운명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이하의 시업만이 완성되어 시인의 완성되지 못한 운명을 영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시인의 개인적인 운명을 비정하게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비정함과 영원함이 우리를 끝없이 매혹시키는 것이다.
물상의 커튼 저편에 도사린 공포
당시唐詩의 전당에서 이하의 시명詩名은 생전에도 높았지만 그의 사후 그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끊임없이 나타난다. 우선 만당晩唐의 대조적인 두 시인들인 탐미파의 이상은과 백거이의 숭배자로서 황소의 반란에 참여하였던 피일휴皮日休와, 몽고군이 침입한 송대 말기 최후까지 송왕조에 충심을 바치고 몽고족의 정부 원元에 봉사하기를 거부하였던 송의 유민시인遺民詩人 유진옹, 사고, 왕원량이 있다.
송대 말과 마찬가지로 북에서 만주족이 침입한 명대 말기 행동적인 지식인들의 결사인 복사復社의 명사들도 이하 시의 주석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이하 시의 애호자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중국 문학사상 참된 애국자들의 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근대 중국에 이르러 나타난 두 인물 역시 이들의 계보에 동참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바로 담사동이다. 그는 강유위와 양개초 등이 주도한 무술변법에서 반동파의 쿠데타로 신변의 위험이 닥쳐오자 \"중국의 쇠망은 개혁을 위해서 피를 흘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를 위해서 내 피를 기꺼이 바치겠다\"라고 말한 뒤에 반동파의 손에 의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때가 서른네살, 불교에도 정통했던 이 정열적인 혁명가는 말하고 있다. \"고금의 여러 시문집을 읽어 보았으나 완전무결한 것은 도연명과 이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노신이다. 모택동이 \"문화전선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완강하며 가장 정열적인 민족영웅\"이라고 격찬한 노신도 담사동의 경우처럼 이하시의 애독자였다. 모택동 또한 이하시의애독자였다. 그는 진의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찍이 이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하늘이 유정有情이라면 하늘 또한 늙지 않겠는가?\' \'닭울음 한 소리에 천하가 밝아온다\' 그렇다면 이하의 시는 매우 진보적이다. 한 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이처럼 이하는 각 시대의 우국지사, 혁명가의 계보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애호를 받아온 것일까? 이하 자신은 비행동적인 시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을 거부당한 자신의 잠재력을 내면에 응집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잠재적인 행동에의 에너지는 언제든지 폭발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그 에너지가 각 시대의 우국지사, 혁명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초기의 니힐리스트 문학도에서 후기의 혁명 문학자로 변모한 노신, 유미주의 시인으로 출발한 문일다聞一多가 우익 테러리스트의 총탄에 쓰러지는 그 극적인 순간까지의 중국 문인들은 모두 귀재 이하의 무한비애無限悲哀를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하가 경련하며 스쳐간 물상 저편에 도사린 공포를 응시하면서 그 광할한 문학의 우주를 주파하여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