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성보박물관 범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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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원자
1992년 03월 121호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조금은 투박한 듯이 보이는 털신 한 켤레. 서울에서 예닐곱 시간을 달려와 스님의 방문 앞에서 가벼운 숨을 내쉬며 섰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그 신이 \'박물관장\'이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며 스님의 방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침 일요일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불보사찰\'로서의 통도사의 명성 때문이었을까. 적지 않은 이들이 통도사 경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수런거림이 통도사 한낮의 분위기를 더욱 활기차게 했다. 스님의 거처 곁, 봄기운에 일제히 몸을 틀며 일어선 매화나무 꽃망울을 바라보며 작은 탄성을 지르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날마다 수백 년, 혹은 천 년도 넘는 이전의 시대를 넘나들며 부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조각으로 빚어냈던 우리 선조들의 혼과 만나며 사는 분, 범하스님이 객을 맞기 위해 툇마루로 내려섰다.
스님의 방은 작은 박물관이었다. 두세 사람이 앉아 있을 공간을 빼놓고는 온통 크고 작은 도자기며 그림들, 고가구, 책, 병풍 들의 유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잘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들은 서로 잘 어우러져 마치 우리가 신라시대나 혹은 고려시대쯤으로 돌아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말없이 차를 따르는 스님의 모습은 그 유물들 속에서 마치 한 폭 수묵화와 너무도 닮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스님에게서 배어나오는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방안 유물의 일부처럼 느껴졌던 것은 스님이 오랫동안 그것들과 시간을 같이하였고, 그 하나하나에 스님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의 문하재 가운데에 칠팔십 퍼센트가 불교 관계 유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불교 유물은 곳곳에 많이 흩어져 있다. 이들은 옛스님네들이 모두 불사며 와공, 탱화들을 직접 제작하여 작품마다 그분들의 혼이 담겨져 있는 불교 신앙의 산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교계의 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빈약하여 도굴, 도난당하면서 제대로 유물을 지켜오지 못하였거나 방치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범하스님, 스님은 이러한 우리 교계의 풍토에서 성보를 조사, 발굴하고 선조의 혼이 어린 유물들을 올바로 보존하는 데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교계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분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스님은 정부에서 인가한 불교계 유일의 사찰박물관인 \'성보 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87년 10월에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성보박물관에는 소장 유물 만여 점 가운데에 약 삼백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각종 고문서를 비롯하여 수많은 불화, 목조 공예, 자수라든가 서화류와 같은 유물들이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일종의 불교특수박물관인 셈이죠. 불교를 소재로 한, 그리고 대부분 통도사 창건 이래 비장되어 오던 유물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어요. 사찰은 스님들에겐 수행의 도량, 불자들에겐 기도 도량이고 그 밖의 국민들에겐 우리의 전통문화를 배우게 하는 곳이지요. 박물관 한 곳에 유물을 모아 놓음으로써 특히 일반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불교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고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지요. 큰스님들의 법문을 통해서도 큰 포교가 되겠지만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도 포교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통도사는 신라시대의 자장율사가 불사리를 봉안하여, 금강계단을 쌓고 부처님의 친착가사와 함께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하여 우리나라 불교사찰로써 일찍이 문화의 터전이 마련된 사찰이다. 그러므로 통도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있는 커다란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도사의 분위기에서 스님이 삼십여 년을 지냈으니 통도사 유물에 대한 스님의 관심과 애정은 출가와 함께 시작된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경내의 무심코 발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를 보면서도 그 돌이 언제 그곳에 와 박혔는지, 통도사의 새로운 기둥 하나라도 그것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는지를 스님은 훤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친착가사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유난히 탱화가 많은 통도사의 유물들을 올바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스님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옛스님들이 수행 중 틈틈이 원력을 세워 만들었고, 만인들의 예배 대상이 되어 오던 것을 후손된 도리로 지켜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본디 통도사의 유물들은 1954년 관음전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신도 참배 형식으로 공개해 오다가 1970년에는 만세루 독립 건물에 전시실을 마련해 옮겼다가 약 팔십여 평 규모의 성보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건물을 짓는 데 삼 년이 걸렸고, 그 뒤 개관까지 준비 작업을 하는 데에 꼭 일 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에 스님은 꼬박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박물관이 개관된 뒤부터 유물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도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박물관이 개관됨으로써 얻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별 의미없이 소장되어 오던 \'오계수호신장도\'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탱화라는 사실이 발견되어진 점이라든가, 예천 용문사에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만다라 탱화\'가 통도사 승가대학 경장 안에도 있었던 사실이 발견된 것이 그것이다. 또 보물로 지정된 \'문수사리보살무생계경\'이 고려대장경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책이라는 사실과, 노스님들이 대대로 원불로 모시던 \'금동삼존불상\'이 그러한 유형의 몇 안되는 불상 가운데에 가장 섬세하다는 사실이 발견되어진 것 또한 스님이 얻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박물관에 들르면 스님의 발걸음은 유난히 \'문수사리보살무생계경\'앞에서 오랫동안 멈춰지곤 한다. 그동안 사찰의 사적지 발굴이 불교 밖에서 이루어지던 것이 박물관 개관과 발맞추어 불교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성보박물관 탄생이 건져 낸 성과이기도 하다.
스님은 요즘 일주일에 반쯤은 통도사 밖에서 보내고 있다. 전교구 본말사 불화집을 간행할 원력으로 시작된 직지사 본말사에 대한 불화 조사로 직지사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니기 때문이다. 불교 문화재 가운데에 불상이나 탑, 성물, 금속 계통의 유물보다 소실되거나 도난당할 염려가 많고, 자료 자체에서 오는 보존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탱화의 조사에 시급함을 느껴 시작한 이 작업은 본사를 중심으로 해서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생각만큼 일이 빨리 진척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인 불상이나 탱화의 조성 경위나 모양, 등장 인물 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신도들이 와서 물었을 때 그 물음에 충분히 답할 수 있을 만큼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주지 스님이 바뀔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법당을 보수하거나 새로 크게 짓고는 하는 과정에서 탱화등이 훼손되거나 유실되는 것을 볼 때마다 스님의 마음은 착잡하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하여 자연적인 훼손보다는 인위적인 손실이 더 많은 절집안의 현실이 스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지난해, 고려시대에 제작된 \'수월관음도\'가 뉴욕의 경매 시장에 팔려 나왔을 때에도 아쉬움을 넘어서 스님의 마음은 여러 의미에서 답답했으리라.
\"수월관음도와 같은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지요. 사찰에서 한해 동안 도난당하는 탱화가 수백 점이나 되는 형편으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끄지 못하고 있는데, 더 무얼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종단적인 차원에서 유물의 보존과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가나 종단에만 미루지 말고 우리 종도들이 솔선수범해야지요. 우리가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적인 장치를 해놓아도 지키기가 힘들 겁니다.\"
각 절에 모셔져 있는 유물들을 각 교구 본사 중심으로 모아 놓아 그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램을 스님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오랜 시일이 걸려야 될 듯싶다. 그래서 화재나 도난을 당하더라도 원형 복원을 할 수 있도록, 모셔져 있는 자료만이라도 조사 작업을 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다른 곳에서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하여 유물을 모으고 있는 형편이지만, 우리는 있는 유물을 보관만 하면 되는 좋은 여건인데도 거의 관심이 없어요. 종단의 차원에서 유물을 지키지 않으면 그나마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성보마저도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유물을 보존, 관리하는 데에 필요한 전문 요원 양성이 시급합니다. 최소한 본사의 소임 보는 이들만이라도 의무적으로 교육을 시켜 바른 이해를 갖게 해야지요.\"
성보박물관 뒤꼍에는 여느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백여 개는 족히 넘을 듯한 항아리가 땅으로 머리를 박고 있다. 어른 몇 사람은 들어가 앉아도 될 성싶은 크기에서부터 한아름 크기의 작은 것에까지 많은 옹기가 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박물관이 문을 열자 뜻있는 이들이 오래 된 항아리를 스님에게 보내 준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 세미나를 갖기도 하였던 \'금동삼존불\'도 노스님네들이 대대로 원불로 모시던 것을 내놓은 것이고, 그 밖에 각종 불상이나 경전들을 기증해 오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삼십 년 전 통도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선원 등 여러 제방 선원에서 수행하였던 시절과 직지사에서 관응스님을 모시고 공부에 전념하였던 시절, 그리고 총무원 집행부에서 소임을 보았던 시절을 빼놓고는 주로 통도사에서 살았던 스님은 박물관에서의 일과 수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일을 하든 수행하는 힘의 축적이 있어야 그 힘을 바탕으로 일이 추진될 수 있겠지요. 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고 싶을 때는 기도하고, 독경하고 싶을 때는 독경을 하며 정진을 합니다. 박물관을 꾸리는 일이 수행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수행의 한 방편일 뿐, 언젠가 견성성불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지요.\"
박물관을 전세계의 어느 곳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가꾸기 위하여 스님의 하루, 그리고 한 해는 늘 분주한 듯이 보인다. 올해 불탄일 기념으로 \'탱화초본특별전\'을 계획하고 있는 일이나 우리 불교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데에 주력하는 일 또한 스님을 바쁘게 하는 요인이다. 기자 일행에게 박물관을 잠시 안내해 주고는 관광객의 물결속으로 사라져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댓돌위에 그 투박하게 보였던 털신이 비로소 스님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의 삶이 전승된 큰 울이 곧 문화\' 라고 한다면 성보박물관을 꾸리고 있는 스님의 모습은 문화를 일구어 나가는 선두 주자의 모습에 다름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