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석전 박한영 스님 5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별기고 - 서정주 1992년 03월 121호
1948년 5월인가 6월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모처럼 기회가 닿아서 정읍군의 내장사에 계시는 우리 석전스님께 인사차 아내와 함께 찾아뵈었다. 그때에 스님의 연세는 일흔아홉이었다.
스님은 우리 내외의 건강함이 무척이나 반가우신 듯이 언제든지 무엇이라도 감싸안을 것 같은 엷은 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맞으셨으나, 찬찬히 살펴보니 스님의 한쪽 눈이 반쯤 감겨 있길래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아, 이 사람아, 한번 들어보게나. 이 한쪽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그 의사란 사람들이 칼로 때짝때짝 건드리더니만 그만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네. 어허허허허!\" 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스님은 자기 자신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라도 마치 남을 웃기려는 듯이 가볍게 이야기하고는 하였다.
한동안 그렇게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다가 스님은 문득 내게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당시에 동아일보 사회부장 직을 맡고 있던 때라 그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래? 그거 잘 되었네.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요즈음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육당이나 춘원같은 사람들을 좀 구제해 내도록 하게. 그 사람들이 친일파의 거두로 몰리고 있다지만, 그게 어디 그사람들의 본심이었겠나?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들 재주가 참 아까워! 그만한 재주가 어디 흔한가?\"
말씀을 마친 노스님의 얼굴에는 어느덧 수심이 가득 고이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스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나는 언젠가 만해 한용운 스님이 \'서울에서 오세암으로 돌아와 박한영스님에게\' 라는 제목의 한 칠언절구 속에서 표현한 그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늘 가득 밝은 달님, 당신 어디 계시오?
온세상 단풍으로 나 혼자 왔소
달과 단풍 서로서로 잊어버리고
내 마음만 남았기에 데불고서 헤매오
一天明月君何在
滿地丹楓我獨來
明月丹楓共相忘
唯有我心共徘徊
만해스님께서 느끼신 그대로 맑은 보름달처럼 곱게 닦인 석전스님의 마음을 때때로 가리는 구름처럼 이 때는 육당과 춘원이 당하는 고초가 늘 스님의 마음을 어둡게 했던 것으로 느껴진다. 육당이나 춘원은 모두 한때는 석전스님의 문하에서 불교도 배웠고, 더구나 춘원은 스님 앞에서 불교도가 될 것을 맹서해 머리까지도 박박 깎은 적이 있으니, 더더욱 스님에게는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았겠는가?
둘이 서로 보고 마음에 들어
밤 들어서 제 절로 같이 갔었지
내버려 둔 눈길에서 소곤거린 말
맑은 물이 내 마음 비추는 것 같았네
相見甚相愛
無端到夜來
等閑雪裡語
如水照靈 
위의 시도 만해스님이 \'영호스님과 함께 유운스님을 찾아 뵙고 밤에 같이 돌아오며(與映湖和尙訪乳雲和尙乘夜同歸)\' 라는 제목으로 우리 석전스님을 두고 쓰신 것이거니와, 이 시구절 가운데에 \"내버려둔 눈길에서 소곤거린 말 / 맑은 물이 내 마음 비추는 것 같았네\" 의 느낌은 그날 오후, 스님과 나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담겨 있어서 내 마음이라는 것도 석전스님의 맑은 호수 같은 마음속에 늘 잠겨드는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스님과 내가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좋은 점만을 들어서 스님께서는 마치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듯 하는 손길과 음성으로 거듭거듭 염려하고 계셨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그런 총명한 재주는 누구에게도 본 일이 없다\" 하신 것은 동양철학자인 범부凡夫 김정설金鼎卨씨에 대해서였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에 해는 벌써 석양빛으로 물들어 갔다. 너무 늦었다 싶어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일어서니, 스님께서는 아직도 마루에 깔려 있는 금빛 햇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직도 햇빛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갈려구 그려?\"
이 말씀은 마치 그때로부터 열다섯 해 전에 불경공부를 하려고 찾아갔을 때, \"나하고 같이 여기서 공부해야지\" 하셨던 그 말씀의 연속으로 느껴졌다. 그때 스님이 가리키시던 마룻바닥의 금빛 햇살의 기억은, 내 마음을 어디론가 기울이는 그 순간이면 문득 역력한 그리움으로 되살아 나는 것이다.
내가 스님을 마지막으로 만나뵈었던 그 해 겨울에 석전 박한영 스님은 일흔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뜨셨는데, 그의 법손法孫인 최세묵催世默스님은 대략 아래와 같이 임종 때의 한 장면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석전스님이 불교에 귀의하시던 열아홉 살 전에는 고향마을의 서당에서 오랫동안 유교경전들을 읽었는데, 그 때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휘호揮毫 한 폭을 중노릇하러 떠날 때부터 평생 동안 곁에 지니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임종때가 가까워짐을 느끼자 스님은 가까이 지내던 제자들을 불러 앉히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이런저런 마을에 사셨던 아무개 선생의 후손에게 전해드려라. 너희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 이것을 간직하기도 짐이 될 것이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어느 여름 한철을 나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뒤쪽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에서 묵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후 절 안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명상에 잠겨 있자니, 이절의 주지인 영월永月(?)스님이 내 곁에 와 앉으며 말씀하셨다.
\"영호스님의 부도浮屠가 아직도 제대로 모셔지지 않은 걸 모르실 겁니다. 요즘에야 겨우 그 분의 문인門人들이 뜻을 모아 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중인데, 돈이 꽤나 모자라서 걱정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 부족액을 선뜻 내가 담당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 것과, 또 그 뒤에 우리 석전스님의 한문문집의 번역에 부족한 대로 나도 한몫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시방삼세의 불보살님들 앞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스님의 그 청정원만하셨던 크나큰 자비의 길에 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되어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까닭은 어인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