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춘부待春賦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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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현응
1992년 03월 121호
이국 당에 볼모로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을 두고 읊은 옛 시에 \"척박한 오랑캐 땅에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가 않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땅도 춥고 마음도 추우니 무슨 꽃이 피겠는가?
최근에 사시사철 꽃이 피는 태평양의 한 섬에 살아본 적이 있는데, 그곳 역시 봄이 와도 봄 같지를 않았다. 일년 내내 땅도 덥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사람들은 봄의 새로움과 희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겨울의 모진 추위와 생활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산기슭의 이름모를 새싹에도 감회가 새롭고, 꽃향기 그윽한 봄밤의 소쩍새 울음에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그 때 비로소 \"북받치는 마음엔 꽃만 보아도 눈물이요, 상심한 가슴엔 새소리도 가슴 저민다\" 라는 구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리라.
언젠가부터 우리는 봄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들\'을 빼앗겼기에 봄을 맞을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고, 보릿고개 넘어가던 어려운 시절에는 봄은 고통 그 자체였으며, 억압과 독재가 횡행하던 시절에는 봄은 불온시 되었다. 척박한 사회, 경제풍토로 말미암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계층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봄의 상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 된 부자와 특권층, 그리고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중간계층 일부가 그 주인공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풍요를 벌레와 축생처럼 그저 소비하고 발산할 뿐인 채 개인과 사회의 목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봄이 희망과 미래와 꿈을 뜻하는 것이라면 봄을 가슴에 품음은 삶과 꿈과 이상을 가지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풍요해져도 스스로를 감당하며 누릴 줄을 모르고 개인의 꿈과 사회의 비전을 상실하고 자신과 이웃을 어떻게 관리 조정해야 할 줄을 모른다면 그보다 가혹한 봄의 상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봄의 상실은 척박이나 결핍과는 반대로 \'풍요\'에 기인하고 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며 동시에 많은 교훈을 준다.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이 차츰 해소되고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를 이룩하면, 그리고 우리의 경우 통일을 성취한 뒤에는 개인과 사회의 꿈과 이상은 없어지는 것인가? 세우고 나아가야 할 목표는 더 이상 없는 것일까?
요즈음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추구했던 인류사의 가장 아름다운 꿈-평등, 풍요, 정의 사회-이 소멸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들도 물론 평등과 풍요를 이룩한 공산 사회 다음의 개인과 사회의 목표나 비전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고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이제 그들을 대신하여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자유와 풍요\'의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풍요롭고도 자유로운 삶들이 추구하고 이룩해야 할 개인의 삶과 사회의 이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봄을 맞지 못하는 것처럼, 부를 이룩한 사람들도 방향과 이상을 잃고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봄을 상실해 버린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풍요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마도 우리가 새롭게 기다리는 봄은 결핍과 풍요, 분단과 통일, 평등과 자유를 뛰어넘은 그 어떤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