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를 졸업하고 절에 가면 공부를 더할 수 있다 하여 들어온 산문이었으나, 새벽예불이며 도량석에 마음이 끌려 선뜻 행자가 되었다. 금산사와 월정사에서 행자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 시절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물리도록 먹었던 월정사의 감자밥이다. 오십년대 밀에서 육십년대 초였으니 절집안 안팎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쌀과 보리쌀에 감자를 깎아 밥을 푸다 보면 아래도 어른 스님에게 밥알이 더 가기 마련이다. 밥을 푸다 보면 아무래도 어른 스님에게 밥일이 더 가기 마련이다. 나중에 말석인 행자들에게 돌아온 밥그릇엔 감자 서너 개에 보리쌀이 열댓 개, 쌀알이 두서너 개 붙어 있었으니, 어린 나이에 배가 늘 헛헛해 하던 기억이 팬. 쉰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감자로 된 음식에 손이 별로 가지 않으니 그때 감자에 어지간히 데인 모양이다. 주식이 그러하였으니 간식이라고 마땅할 리 없었다. 해서 어쩌다 국수 공양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한껏 배가 불렀던 기억이 난다.
금산사에서 살던 시절, 선정을 많이 익힌 스님에게서 관법觀法을 배운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백골관白骨觀을 배울 때였는데, 열 몇 살 어린 나이로 백골을 보며 ‘일체가 무상함’을 명상하여 ‘나’ 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골 너머에 있는 참뜻은 헤아리지 못한 채 저 원효대사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견성하였다 하니 내 그 물을 먹고 견성해 보리라 하여 공동묘지로 해골바가지를 찾으러 다녔다. 물론 견성할 때가 아니었는지 결국 해골바가지의 물을 찾지 못하고 말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무지한 순수에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그 때엔 꽤나 진지했다. 혹 그 때 내가 관법을 잘못 익혔으면 명당자리나 보러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나 찾다 만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를 일이다.
어린 나이에 산문에 들어와 불법을 익혀 제 몸으로 무르익히기까지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세속에의 막연한 동경이다. 그 중에서도 사춘기 수행자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이성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다. 누구라도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수행자로서의 삶은 끝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아침 일찍 절 마당을 쓸면서 보는 여인들의 하이힐 지국은 이성에의 그리움을 부추기곤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푸는 방법 또한 있는 법, 나는 그러한 것에의 상념을 일기를 씀으로써 해소시켰다. 내 마음의 흐름에서부터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 어린 소년에게 비친 어른 스님네의 언행에서 보고 느낀 것까지 빠짐없이 써 내려 갔다. 큰방 생활을 했으니 남들 앞에서 일기를 쓸 수는 없는 일이어서 주로 아침예불 전 큰 방 탁자 밑에서 썼다. 그러려니 남들보다는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옷을 아예 입고 행전까지 찬 채로 잠들어 옷 입는 시간을 아껴 일기를 쓰곤 했다. 때로는 여름날, 점심공양을 끝내고 잠깐 틈나는 사이 개울가에 나가 나를 흔들고 지나기던 것들을 일기라는 출구를 통해 토해 내었고, 흐르는 물을 보면서 조건 지워진 모든 것들은 ‘항상 하지 않음’을 명상하기도 했다. 그 시절 일기는 내게 구원의 의미였으나, 감춰 놓았다가 읽어 보면 과거로 돌아가게 해 발전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 또한 덧없이 느껴져 군대 가기 전에 일기장을 다 태워 버린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또 나를 올곧게 일으켜 세운 것은 ‘개인 독방을 갖지 말고 부처님을 모신 큰 방에서 떠나지 말라’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을 꼬박 지킨 일이었다 그것은 어린 날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정신의 끈을 바싹 조이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이 생에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내 힘을 ‘도제양성’에 쓸 것을 발원했다. 남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해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교육을 통해서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방법을 후학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내가 불가에서 해야 할 몫이다. 온전한 다리 하나는 놓지 못하더라도 징검다리 역할만큼은 잘해 보지는 것인데, 앞으로의 내 수행에서의 시간들은 그 발원을 실천하는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