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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감정과 비교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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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05월 207호
아내는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린 지 삼년 만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 장인의 반대는 단호하다 못해 결사적이었다. 반대의 이유는 간단했다. 사윗감이 딸에 견주어 너무나 열등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강사인 딸에게 한 살 더 많은 대학생이라니,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늘씬한 외모에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강사 신부감에게 들어오는 혼처들이란 대부분 이미 교수이거나 적어도 ‘사’자를 끝에 걸친 자리들 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내였다. 결혼 생활 십사년째인 지금도 자기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멍청한 여자라면 연애 감정에 빠져 있을 때의 상황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흔히 ‘콩깍지가 씌었다’고들 하지만 아예 눈이 멀었다는 표현이 더 사실에 가깝다.

연애 감정의 주관성
인간은 한번 연애 감정에 사로잡히면 명철한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다. 우리는 연애 감정에 휩싸이자 마자 제삼자로서의 객관성을 잃고 당사자로서의 주관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곧,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애 행위의 대상에 대한객관적 ‘사실판단’이 아니라 주관적 ‘가치판단’을 행사하게 된다. ‘콩짝지가 씌었다’ 느니 혹은 ‘눈이 멀었다’ 느니 하는 말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은유일 터이다.
사랑이라고 한번 확산한 결단은 죽음으로도 돌이키기 어렵다. ‘존재는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는 말은 적어도 사랑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유보되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부여 된 가치는 모든 존재의 최우선 과제인 존재 그 자체, 곧 생명마저도 거부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앙심의 주관성
신앙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학자들은 연애 감정과 신앙심을 같은 문법으로 읽는다. 신행 생활을 할 종교를 선택할 때에는 객관적인 사실 판단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앙심을 갖고 나면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 역시 연애 감정에 빠진 사람처럼 신앙 행위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가치 판단에 몰입하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만인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라는 뜻일 터이다. 만일 종교의 진리 여부가 객관적으로 판명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종교는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동시에 수 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신앙심의 주관성 때문이다.

연애 감정과 신앙심의 절대성
연애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연애 행위의 대상을 절대시하는 것처럼, 신앙심을 가진 사람은 신앙 행위의 대상을 절대시한다. 남들 눈에는 사이비종교로 보일지언정 믿기 시작한 사람의 눈에는 진리로 보인다. 어떠한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도 진정으로 믿기 시작한 사람의 판단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대상을 향해 자신만의 주관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부인 탓이기도 하지만 더러는 내가 가사를 돌본다. 밥도 짓고 청소도 한다. 아이들이나 이웃은 내가 담근 김치가 더 맛있다고 야단이다. 청소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서 아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서 좋고, 또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하지만 너무 바쁘거나 지쳤을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싫어진다. 그럴 때 기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중국 음식점에 전화를 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물을 것도 없이 자장면이지만 난 짬뽕이다. 나는 진득하고 쿰쿰한 자장면보다는 얼큰하고 칼칼한 짱뽕이 훨씬 더 좋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짱뽕이 아니라 자장면을 시키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음식값이 같아서가 아니다. 음식에 대한 기호는 주관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내게는 짬뽕이 절대적으로 맛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지장면이 절대적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종교학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절대의 상대화
신앙심은 연애 감정이나 음식에 대한 기호처럼 주관성을 그 본질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 감정의 대상이 절대적인 것처럼, 모든 신앙심의 대상은 그 신앙을 기진 그들에게는 절대적이다. 비교종교학은 바로 이러한 사실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내 신앙을 절대시하는 것처럼, 남도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연애 감정이나 신양심은 개인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 모든 개인이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존재하게 될 때, 다시 말해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가 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내게는 절대인 것이 너와 나 사이에 놓일 때는 상대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절대이지만 서로에게는 상대적인 것이 된다.
비교종교학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곧 내게는 목숨마저 담보하는 절대적인 신앙에 바로 그러한 또 다른 남과 함께 있게 되면 고스란히 상대화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신앙심의 편견과 독단
짬뽕 맛이 최고라고 여기는 그 누구도 자장면을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짬뽕 먹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기가 결혼한 여자(남자)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여자(남자)인데 너희 수많은 남자(여자)들은 왜 바보같이 최고로 멋진 내 여자(남자)와 결혼하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그런 편견을 갖거나 독단을 부리지 않는 것은 내게는 절대이지만 남에게는 상대화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스러운 것은, 이러한 연애 감정의 경우와 달리, 신앙심의 경우에는 편견과 독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앙심 역시 분명 주관적인 것이건만 그것의 절대성만을 고집하며 상대성을 깨닫지 못하는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진리 판단의 유보
비교종교학은 이러한 편견과 독단의 파괴를 지향한다. 편견과 독단은 너의 존재를 망각한 채 자기에게만 사로잡히는 데에서 비롯한다. 나는 언제 어느 경우에나 내가 아니다. 내 앞에 선 너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너인 것이다.
비교종교학도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명제 하나는 종교학의 아버지 막스 뭘러가 피테에게서 인용한 하나(자기)만 아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선언이다. 비교라는 행위는 둘 이상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 둘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내 앞에 선 너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내가 아니라 너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교종교학은 너를 향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주관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반드시 상대적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적인 것은 아무 데에도 없다. 현대의 지성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절대를 거부하고 주체를 해체하고 있다.
그래서 비교종교학은 진리 판단을 하지 않는다. 비교종교학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진위를 판단하는 작업이 아니다. 비교종교학은 불교인과 기독교인을 동시에 모두 이해하려는 시도, 곧 인간 이해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