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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영귀산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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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12월 178호
이미 깊을대로 깊어진 늦가을 들녘과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운주사로 가는 길은 광주를 거쳐, 너릿재를 넘어간다.
가을걷이가 끝나 황토와 객토가 드러나는 가 하면 볏단뭉치들이 허허들판의 초병처럼 버티어 섰고, 수로와 둑길에는 억새 물결이 시들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능주면에 이르러 옛날 영산강 상류의 물이 이 곳까지 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춘양면에서 동암으로 돌아서니 이내 운주사 입구에 이르렀다. 초입부터 무리를 이룬 바위 아래 여러 불상은 참으로 못생긴, 그러나 정이 가는 모습들이다. 협곡 사이에 구층 석탑을 시작으로 요사체까지 도열하고 선 갖가지 형태의 석탑 또한 이채롭기 그지없다.
탑의 형상은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올린 것, 마치 호떡과 은강을 올려 놓은 형상이며 석탑에는 빗금이나 마름모꼴을 새겨 놓은 것이 흥미롭다. 불상은 극히 단조로운 형상으로 오늘날 현대조각의 단순한 데포르마숑 (변형)의 한 전형을 보게 하며, 건강한 원시성과 집단 미의식이 뿜어내는 장엄한 현장감이 물씬 풍겨 난다.
사실 천불 천탑이 있었다는 운주사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다만「장길산」(황영석 작) 이라는 소설이 이 곳을 무대로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탑을 세우고 와불臥佛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운주사 창건 설화를 삽입시켜 대미를 장식한 이야기로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에 이르기 까지 기록이 알려지지 않아 더욱 수수께끼요, 신비감이 조성된 요지로 발전한 셈인데 보는 이에 따라 불교 사원이기보다는 밀교 사원이라고 하고, 민간 신앙의 기복처라는 주장과 천민 노비들의 해방구, 당대 호족 세력의 집단 발원지였다는 등 추측이 난무한 곳이다.
한편 고려시대의 불상이었던 만큼 당시 몽고족의 변란을 막기 위해 \'천불천탑\'의 상징이 될 인왕백고仁王百高도량으로 이루어진 불사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국토 지리상 여건으로 풍수도인 도선 국사의 풍수설이 전해오는 바 국토의 균형을 위해 허한땅에 기氣 충전을 위한 비보풍수裨褓風水의 전형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우리나라의 국토는 배가 가는 지세 (行舟形)인데 키와 노가 기울어 표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복부인 배에 해당하는 운준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여 배의 균형을 잡게 하였다는 설이다.
현존하는 석불은 일흔 구, 석탑은 열여덟 기의 확인으로 그치지만 그 옛날의 불상를 복원해 보려고 이른바 공사를 지휘하였다는 공사 바위에 올라서 보았다. 대웅전 위로 펼쳐지는 시야로 용강리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운무는 그야말로 구름 운雲자를 지닌 운주사雲住寺답게 느껴진다. 주산인 영귀산靈龜山협곡의 용맥은 무등산 자락으로부터 꿈틀거리며 달려오다가 이 곳에 빠져 멈추니 협곡엔 수 많은 탑과 불상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천불천탑골의 거대한 와불과 칠성바위 들을 살펴보며 공중 부감俯瞰을 통한 밑그림을 그리게 된 지는 사실상 운주사를 답사한 지 팔 년이 지난 일이 되었다. 그 깊고 아득한 원願이 지나온 시간 동안 쌓이고 모여서 풀어진 것일까.
개인의 은혜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유산의 자궁으로 이십세기 운주사 그림 가운데 한 점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만인에게 회향하는 인연을 낳았다.
이처럼 \'천불천탑골 운주사\'는 만인의 소망과 노래를 담아 보려한 나의 정서가 녹아 있다.
한해의 끝에 서서 천불천탑의 의미와 새날의 발원에 잠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