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갱죽 먹으며 첫걸음 내디딘 중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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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6년 12월 178호
\"중 노릇하러 왔다고? 니, 보리갱죽아나?\"
은사 스님과 처음 대면하던 날, 대구 서봉사 근처 신도 집에 가 엿을 다려주고 있던 그 분이 내게 던진 첫마디가 그랬다.
보리갱죽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 앉아 있으니 내 심중을 눈치챈 듯 말씀했다.
\"보리갱죽도 모르면서 중노릇 한다고 해? 보리갱죽은 말이다. 시래기에 다 보리를 넣고 끓이는 것인데 동냥해다가 보리갱죽을 쑤워 먹을 줄 알아야 중 노릇할 수 있다. 할 수 있겠나?\"
열 두서너 살이면 결혼해 여자로서의 삶을 열던 1930년대 말, 내 나이
스물 셋이었으나 결혼이며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사무치게 중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 사명대사의 전기를 이야기책으로 읽으며, \'꼭 나도 도를 닦아 사명 대사처럼 되리라\'는 꿈을 한번도 늦추거나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나 오빠들이 독립운동을 한 집안 분위기라서 어려서부터 그들의 잔 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까닭으로 일찍이 나라를 구해야 하는 일에 눈을 떴던 것 같다.
열일고여덟살 때 , 오빠들 대신 일경에 끌려가 곤경을 당하면서도 사명대사처럼 되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리란 꿈을 이를 앙다물며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오빠들처럼 독립운동을 했을까.
비구니 스님이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고 비구니 강원도 없던 시절,
황해도 집을 나와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와 몇 다리를 건너 스님을 만난 참이었고 , 이제 바야흐로 중이 돌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데 보리갱죽이 뭐 대수였겠는가. 그 길로 은사 스님을 따라 스님이 계신 팔공산 자락 부인사로 갔다.
걸어 걸어 다다른 부인사는 말이 절이지 웬만한 속가의 집만도 못했다. 불타 없어진 절 터에 오두막처럼 동그마니 절을 지어 놓았는데 대문도 울도 없는 그런 집이었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신라, 고려 때에는 이천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만큼 큰 사찰이었고, 고려대장경초조를 판각한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임진 난 때 불타 버려 그 위용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지 올리고 불공하는 상좌 두는 것이 내 소원이었느니 네가 그런 것을 잘 배워서 내 원을 들어다오.\"
붉은 가사를 입고 요령을 흔들며 무엇인지를 읽는 스님의 조카 상좌된다는 상덕스님을 보며 광대들이 하던 놀이를 연상 해 내곤 \'절 집안이 이런 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터라, 못하겠다는 말은 못하고 \'도를 닦고 싶다고\' 만 말했다. 그러자 우리 스님이 달래듯 말했다.
\"행자 때 이런 것을 배워두어야 하고, 공부는 계를 받고 나서 차츰 하면 된다. 지금부터 도 통하겠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그러면서 삼 년 동안 행자 생활을 착실히 해야 정식으로 중이 된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이월 초에 왔으니 아직 겨울이었다. 옷이라곤 모두 광목으로 만들어 입던 때 , 개울가에 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깨진 시루에 재를 하나 가득 넣고 가운데 물을 부어 맑은 잿물을 받아 비누로 썼다. 물 속에 집어넣으면 이내 뻣뻣해지는 광목옷 을 잿물로 비벼 빨아 삶고 헹구었다.
지금처럼 무슨 고무장갑이나 있었던 가. 날 손으로 얼음이 버석대는 개울물을 깨어 빨래를 하다 보면 손이 너무 시려 옷 속을 헤집고 가슴에 손을 넣어 녹이곤 했다. 그렇게 행자 시절을 보내는 사이 손금은 다 닿아 없어지고 손은 늘 물에 불어 터져 있었다.
그래도 \'이 시집살이를 잘 견뎌내야 해인사 선방으로 가 공부할 수 있다 \' 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환해지곤 했다. 구도에 대한 열정이 가슴 깊이 타오르던 무심의 세월이었다.
절에 들어온 지 한 달 반만인 삼월보름에 삭발을 했다. 보통 행자 생활을 끝내고 삭발을 했으나 신분이 확실하고 중 될 싹이 있어 보이면 앞당겨 깍기도 했던 것이다. \' 왜 중이 되려하느냐, 시집을 보내 주겠다\' 하는 신도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하루라도 빨리 머리를 깍고 싶었고 , 마침 내 생일이 삼월 보름이요 선덕여왕의 생일도 삼월 보름이라 그날 머리를 깍았다. 새벽 예불을 끝내고 나와 하얀 달빛이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당에서 은사 스님의 사제되는 이가 내 머리를 깎았다.
삭발을 끝내고 손을 머리를 만지니 그렇게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어느해 , 밖에서 부전 스님이랑 법사 스님을 모셔다 백일기도를 하는데 상노스님이랑 은사스님, 부전스님, 법사스님의 방 화로에 불을 넣고 물을 떠다 드리는 일, 빨래하고 공양 짓고 마당 쓸고 예불 드리는 일이 모두 내 몫이어서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마침 겨울이어서 손은 부르트고 터져 나중엔 쩍쩍 갈라졌다. 그런 손을 보고 누군가 그랬다. 금실에다 밥풀칠을 해서 갈라진 곳에 감아 놓으면 아프지 않다고, 열 손가락에 금실을 감아놓고 밤낮 없이 일을 했는데 실이 맨날 젖어 있어 그랬는지, 아플 틈도 없어 그랬는지 아픈 줄 모르고 백일기도를 끝냈다. 그런데 기도를 끝내고 보니 감아 두었던 실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또 그런다. 그냥 놔두면 큰일 난다고, 의원에 가니 의사가 손을 째고 실을 다 뽑아내는데 보니 금실이 뼛속까지 박혀 실박힌 자국이 허옇게 드러났다. 손이 그 지경이 되도록도 모르게 참, 지독히도 일만 해댄 시절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깨 농사며 콩 농사를 짓느라 더위를 먹는 것은 예사였고, 모를 찌러 논에 나가 종아리며 발에 달라붙는 거머리들을 뜯어내다 보면 다리에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행자 시절 첫 여름이었을 게다.
밥을 지으면서 거머리에 뜯긴 다리를 아궁이 불에 쬐었더니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나무 기둥처럼 되었다. 의사가 피고름을 짜낸 자리에 가제를 수도 없이 틀어막았다.
내 은사 스님은 남편이 죽자 해인사 약수암으로 출가한 분으로 당시 여느 여인네들이 모두 그랬듯이 속가에서 글을 배우지 못해 간단한 글도 읽을 줄 몰랐고 염불도 잘 할 줄 몰랐다. 그랬으니 그 분에게 염불이며 공부를 배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그래서 행자시절 「천수경」과 「초발심자경문」을 나이 많은 처사에게서 배웠다. 유마 거사 같은 분이었는데 , 웬만한 비구 스님들도 그 분에게 불교의식이며 경을 배워가곤 했다.
우리 절에 한번 오면 일 주일씩 머물며 염불이며 공부를 가르치곤 했다. 행자인 내게 따뜻하게 대했는데, 하루는 그이가 아랫목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있다가, \' 중은 그저, 목침 하나 베고 등을 꼬부려 새우잠을 자는 것이다. \'
그말을 들으니 이불하나 변변한 것 없이 목침 하나 달랑 베고 새우잠을 자는 나를 어머니가 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쏟았다.
집을 어떻게 떠나왔던가. 집 근처 못에 신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나왔으니 어머니는 필시 내가 못에 빠져 죽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난 지 오래며 아들 둘은 러시아로 독립운동을 한다고 황황히 떠났고, 어려서부터 천자문은 물론 오언, 칠언시를 줄줄이 꿰며 총명했던 하나 있던 딸은 가라는 시집은 안가고 못에 빠져 죽었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황량했을까 싶어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행자 때 꼭 두 번 울었다. 목침 베고 누워 그렇게 한번 울었고, 한번은 모를 찌던 오월 들녘에서였다. 보리밥에 된장을 넣고 비벼 먹던 밥맛이 그렇게 꿀맛처럼 느껴질 수가 없었는데, 꿀꺽꿀꺽 밥 넘어가는 소리가 우스워 처음엔 웃다가 어머니가 이런 나를 보면 어떠실까 하는 생각에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고 은사 스님이 어이없어 하며 그랬다.
\'저 아, 미쳤는갑다.\'
내 은사 스님은 일만 시킬 줄 알았지 참 무심한 분이었다. 부인사에 온 지 두 해 반만에 사미니계를 받던날 이었다. 특별한 날이니 장삼이라도 입어야 했는데, 변변한 옷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자 스님은 당신이 출가할 때 입고 왔던 까만 장삼을 꺼내 놓았다. 보릿덩이를 쌓아 곳간에 쿡 찔러 놓았던 것을 빨지도 않고 툭툭 털어 내개 입혔다.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꼬깃꼬깃해진 옷을 그대로 입고 가 동화사에서 계를 받으면서도, 스님이 그런 일 에 무심했듯 나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무심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였을까.
여기 저기서 쥐며 뱀들이 튀어와 쏜살같이 달아나던 마당을 오가며, 밤에 호롱불 켜는 것도 눈치보여 헛간으로 들고 가 불켜 놓고 염불 익히며 보낸 행자 생활 세 해를 그렇게 혹독한 시집살이로 꼬박 채우고 비구니계를 받으러 해인사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