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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 법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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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6년 12월 178호
지난 시월달에 교육원의 역경위원회는 「아함경」과「팔천송반야경」,그리고 「석가여래행적송」의 책 세 권을 우리말로 번역해 내놓았다.
총무원, 포교원과 함께 삼원 체제의 하나를 이루는 교육원에서 기획한 \"불학총서\" 시리즈물의 첫 번째 성과이다. 이들은 글귀의 뜻만 새긴 기존의 번역서 와는 달리, 오늘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서 불교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불교의 사상과 나의 삶을 둘로 보지 않는 실천적 관심\"에 기본 시각을 두고 풀어 보인 새로운 번역서라는 점에서 색다르다.
유가지로 서점에도 내놓게 된다 하니 일반인과의 만남도 아우르게 될 이 책들은 강원 학인 들에게 무료로 배급되어, 정식 교재는 아니나 만만찮은 부교재로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역경위원장 소임을 맡고있는 법성 스님은 이 책들을 직접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권마다 앞머리에 붙어 책의 이해를 돕고 있는 , 저마다 이백자 원고지 삼백 장이 넘는 긴 해제 글도 직접 썼다.
그가 쓴 글들은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울림을 주는 힘이 있다.
좌坐와 행行의 과정을 거친 뒤로, 그 둘을 하나로 묶는 작업으로 오늘에 이르는 고통스런 삶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참선과 대사회적 활동과 문자 반야행,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어떤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깔고 앉아 있는 밑자리는 선에 대한 것이다.
올로서 승랍 이십 팔 년 , 속랍으로는 마흔 여덟인 법성 스님은,
그 선을 종지로 하는 용성 가풍을 오늘에 걸맞게 계승하려는 \"각운동\"을 펼치고 싶어한다.
용성스님은 일제시대 때 한용운선사와 함께 삼일운동에서 불교계대표로 참여했을 뿐만이 아니라, 저술과 역경, 선의 대중화운동, 교단의 정화운동 따위를 내용으로 \"대각교운동\"을 편 분이다. 삼일운동 참여를 계기로 , 그 동안의 상구보리의 길을 접고, 민중 속의 대사회적 실천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보살의 하화중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가 「각해일륜」등 서른여 가지의 저술을 남긴 것 말고도,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변역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 주장하여 \"삼장역회三藏譯會\" 를 조직, 서른여 가지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긴 일은 근대 경전 번역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총독부의 사찰령으로 대처의 경향이 크게 늘면서 산문의 분위기가 혼탁해지자 총독부에 건백서를 제출하여 그 폐단을 바로 잡자고 한일은 해방이후 비구, 대처 정화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도봉산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스스로 수행 납자의 본분을 꿋꿋이 지키는 한편으로, 선을 대중화하기에 힘썼으니, \"참선\" 이란 말이 널리 퍼진 것도 그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이 시대에 법성스님이 용성스님의 대각운동을 제창하는 뜻은 어떤것인가. \"오늘에 이르러 선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버리고 , 경전의 가르침과 분리되어 사적인 체험주의와 내면주의에 치중되게 되었어요. 그 선을 불교 본래의 비판적인 실천 정신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제창하는 각 운동의 요체입니다.
중국의 선불교가 갖는 폐쇄성과 조선조의 사회적 고립 분위기를 거치는 동안의 결과로 빚어진 정체성,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법통주의에 대한 고집이 선의 뜻을 좁혀 놓고 말았어요.
개인 체험 위주의 선을 넘어서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선으로 부활되어야 해요.\"

그는 서울법대에 진학하여 일학년 말쯤에 출가한 뒤로, 십년 세월을 경전은 멀리 했던 전통 수좌였다. 용성스님과 한용운 스님의 자취가 어려 있는 서울 대각사에서 묵으며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방학 때는 토굴과 선방을 찾아 화두 일념의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팔십년 오월, 그는 그때 해인사 선방에서 정진중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개인사와 서로 무관할 수 없음이 그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었으니, 이른바 사회과학 쪽에의 관심을 가진 도반들과의 자연스런 교유가 이루어지면서, 강원도 마다 했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점검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지독한 떠돌이 생활이라 걸망을 싸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 문득 결행한 일은 오대산 탄허스님이 입적하기 직전의 마지막 강설을 수한 것 이었다.
「초발심자경문」부터「능엄경」까지를 두루 섭렵함은 그로서는 최초의 체계적인 간경이었다. 경전을 멀리 했다고는 하나,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이 학년 때까지,
속향인 화순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동안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삶의 심연\" 에 짓눌려, 인근의 이름난 법사는 모조리 찾아다녔고, 불교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은 뒤였고, \" 이 아니면 내가 죽을 터\" 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군법사 시절에도 장좌불와을 도모한 바 있었던 십 년 정진의 힘이 그를 붙들었을 터였다.
낮에는 간경과 역경의 나날이 , 그리고 밤에는 좌복 위에 앉는 나날이 이어졌다.
\" 좌선을 하다가도 탁발하고 또한 대중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던 그 옛날처럼, 그것은 따로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란 말이죠.
삶의 역동성이란 활동을 하되 적정하게 자신을 반조해 나감을 수반해야 한단 말이죠.\"
팔십년대 중반에 그가 추구하는 역동적인 삶의 구체 현상은 광주였다.
그 곳 사람이 아닌 타지인의 광주역사에 대한 인식이 그들의 고통과는 무관한 기능적이고 유행가 적인 것은 아닌지, 그 복판에 가서 직접 한번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근본불교연구소\"를 만들어 광주의 청년불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강연하고, 여기 저기에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그 때에 쓴 글은 책 몇 권이 될만한 분량이었으니, 뒤에 한마당에서 「앎의 해방, 삶의 해방」, 그리고 한길사에서 기획한 사상 신서 시리즈 중의 하나로서
「물러섬과 나아감」이란 책으로 묶여 나왔다.
당시에 그가 껴안고 있던 주제는 , 역사와 선, 민중과 선을 하나로 묶는 \"민중선\"이었다. 선을 종지로 하되, 불교 철학이 아닌 사회과학 논리만을 기반으로 삼아서도 안 되고, 불교 내부의 급조된 사회과학 이론에 편승한 대사회 참여는 지양하리라 스스로 다짐해 놓고 있었지만, 그 무렵 그의 행동은 승가 내부의 눈으로는 \"급진적인 사회의식을 표방한 일탈\"로 볼 수도 있었겠다.
일 주일에 한번씩은 불법을 강설한다는 원력을 세워 그 힘으로 버텨나가기는 했으나, 민중선의 구현은 버거운 과제였다. \" 그럴싸한 절에서 보수 신앙 대중을 보호해 주는 \" 식도 아닌, 아무런 현실적인 기반도 없이 도모한 일에 대한 대가는 너무도 혹독해서 팔십년대 말 무렵에는 최악이 되어 자기 부정의 위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무렵의 사회 정치적 여건와 승가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은 무관한 것일 수가 없었다. 호국 불교, 산중 불교의 구태를 벗으려는 대사회 실천 승가 단체들이 결성되는 한편으로 새로운 승가상을 세우려는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모색이 시도되고 있었으니 , \"권승 축출\"이라는 외양으로 나타난 94 년 개혁 불사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한 선우도량은 그 몫을 담당한 대표적인 승가 결사 단체였다. 그들은 개혁 불사가 끝난 뒤 산사로 일제 복귀를 했거니와, 그 들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란 권승을 축출하고, 종단의 제도 몇 가지를 바꾸는 것에 머무를 수 없었다.
법성스님은 \"새로운 수행관을 정립하고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91년도에 창립된 선우도량 핵심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 한국불교가 법맥 중심의 도통주의와 형식주의에 매달려 핵심적인 선의 본질 규명에 소홀해 왔다. 따라서 한국불교를 선종으로 규정하려면 오교양종의총체성을 모두 회통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변화 조류 속에 다양하게 행해지는 신행과 수행을 포괄하는 틀로써 선을 해석하고 정의할 필요가 있\"으므로 , 수행 결사체 등 승가운동의 핵심 과제로서 \"불교 사상의 체계를 시대의 논리로 해석, 정립하려는\" 그의 뜻은 지금까지 열한 번이나 이루어진 선우도량의 결사 수련회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다양한 틀로서 발표되었다.
법성스님에 있어 구십년대란 도서출판 큰 수레를 내어 「천수경」,「화엄경」,「반야경」,「육조법보단경해의」,「원각경」,등 \"팔리지도 않는\" 열 권의 책을 번역하여 펴 낸 시기이기도 하다.
\"문자란 그것을 버리고 얻을 바가 아니고 문자 안에 뛰어들어 그것을 쓰되, 그에 휘둘리지 않는것\"이 문자와의 바른 관계일 터였다.
문자와 실상, 선과 교의 연기적 관계일 터였다. 문자와 실상, 선과 교의 연기적 관계를 올바로 정립해 내지 못하는 한 한국불교의 창조적인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원효나 천태 같은 넓은 서원을 갖춘 분이 안 나오는 것도 사상적인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이사 보따리를 자주 꾸려야 했던 나날을 끝내고 그가 현재 몸 담고 있는 대승사는 \"역경과 수선 도량\"으로 뜻 발원한 곳이다. 그간 어기차게 역경 사업에 힘써 온 가운데 , 89년도부터 지금까지 한해에 두 번씩 \"주제있는\" 선수련법회를 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로 전남 화순의 학담선원에서 전공자 및 일반인을 상대로 법문과 좌선 실수, 그리고 대중 운력을 내용으로 이루어졌던 이 법회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아직도 \"조직적이지도 물질적인 기반을 갖춘 꼴도 아니지만, 참선을 대중화하려는 그의 발원의 소중한 씨앗으로 볼 만한 것이다.
승가가 사상과 수행의 가장 핵심적인 고리로 기능해야 할 층이기는 하지만, 참선이 수행자 중심의 폐쇄적인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참선 도량이 승가에게는 대중 앞에서 화엄경이나 법화경 따위를 설하기도 하는 , 경전에 의한 자기 검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야 하며, 일을 하는 대중들을 위해 석 달로 정해진 것이 아닌, 더 짧은 기간의 방부도 가능한 현실적인 수행처라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그 곳은 사대부중이 모두 동참하는 새로운 틀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선은 노동의 생산적인 토대가 될수 있도록 대중적인 수행 방법론이 개발되어야 해요. 간화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소리에 유난히 민감하거나, 사물의 형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정전백수좌나 마삼근 화두를 들이대는 식이어서는 안 되겠단 말이죠. 개개인 의 관심거리나 능력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는 것이지요.\"

서울 한복판,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의 병풍 같은 건물 뒤로부터 북쪽의 중앙고등학교에 이르는 길은 그 너비가 자동차가 교행하기 힘든 길이다. 선우도량 서울 사무실 식구가 함께 살고 있는 대승사는 그 길 어름에 있다. 그래서 차의 왕래는 드물고, 또한 사람들의 두 발식 걸음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곳이다.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한가해 보이지는 않으나, 현기증 나는 자동차의 속도에 익숙해있는 사람에게는 문득 요즘 잊고 사는 \"사람의 천연한 보행 속도\" 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동네이다.
대승사란 문패만 아니면 절이 아니라 살림이 포시라운 여염집 같아 보이는 이곳은 가까이에 경보궁과 삼청공원, 그리고 비원 따위을 끼고 있어 그런가, 밤이면 산중처럼 적적해진다고 했다.
그 적적한 곳의 좁은 안마당에는 결 고운 이끼가 자라 마당 반쯤을 덮고 있다.
그 고운 생물을 삭막하게 표현하면 공해 지표 식물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끼가 자라는 한 그 지역의 공기청정도는 안심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뜻이다.
지난 삼월에 회향된 대승사에는 늦가을 양광이 가득했다.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저린 팔목을 풀면서, 서울 한복판, 이 좁은 마당의 응달에 자라고 있는 이끼의 뜻을 법성스님은 곰곰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