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도록 부처님과 신장을 그리느라 종이와 먹 사이를 가로세로 누비네 붓을 놓고 차 마시고 나니 밤이 깊어 눈썹달이 가까워 보이네
‘선주산방에서 어느 날’
피는 꽃 지는 꽃 분간도 없이 두들기던 여름 같은 장대비는 잠시 그쳤다 하나 결기를 삭이지는 못했던지 바람 끝은 여전히 세고 차가운 날이었다. 그러나 채색 중인 흰 베(布) 바탕의 탱화 두 폭이 마루가 좁게 펼쳐져 있는 선주산방善住山房 안은 고요하고도 경건하다.
법당 안에 안치된 것이 아닌데도, 저 극채색 그림은 보는 사람을 달뜨게 하는 법도 없이 그저 차분히 경배하게 만드니 기이한 일이다. 개안모발커녕 , 다만 초草일 뿐인데도 부처나 호법 신장은 이미 이 곳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인가.
기척 없이 방 문턱을 넘어오신 스님께 삼배 반 올린다.
세속인 대할 일이 많지 않아서 외인을 만나면 긴장하는 편이올씨다.
자식뻘 나이의 객에게 그리 말씀하신다. 새삼스러운 깨우침이겠거니와, 불모佛母란 부처를 낳는 이, 너와나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는 불청을 드려내 보이게 하는 소임을 맡은 분이다.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오로지 평등 존재로 대하니, 그의 일상을 이루는 어떤 일에 조차 마음을 경홀히 하고 있지 않음을 짐작하겠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성격은 소극적인 데가 많다 하였다. 그가 자라난 곳이 산중이어서 그렇기도 했겠거니와, 싸우다 맞는 것은 괜찮아도, 상대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나이 열다섯이던 어느 날에 동갑내기와 싸우다 몹시 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난 뒤에 자신에 일러둔 바 있었다. 나는 힘으로는 누구와 싸워서도 이길 수 없는 사림이다.
이름 없는 도공의 솜씨라 하더라도 그가 빚어 낸 것이 감동을 주는 데가 있다면, 익어서 무심했던 그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가 성취해 낸 바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허물며 수행자의 몸임에랴. 그는 제 바탕을 마련해 주산 두 분 부모님 은덕이 크다 하였다. 의과대 입학을 염두에 두고 숙명여고를 졸업한 그의 어머니가 금강산에서 맺은 “기연”으로 얻은 한 점 혈육을 품에서 떠나 보내기 전까지 그에게 몸으로 가르친 바는 수행자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엄격한 것이었다. 집에다 부처님을 모셔 놓고 사신만큼, 오신채와 육식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행동거지와 마음씀이 속俗아닌 승曾의 것이라 할만했던 것이다. 그의 다리에 종환이 생겨 잘라내어야 할 지경이었는데도, 가재인지 게인지 물에서 사는 생물을 산채로 짓찧어 붙여 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살생을 하는 업을 지으면서까지 자식을 살리고 싶지는 않노라”며 물리쳤다는 분에다.
평생을 참선과 간경과 염불로 일관했던 은사스님에게 금어의 길이란 당치 않은 것이었다. 불화란 그저 본분사 닦는 여가에나 도모해 봄직한 일일 따름이었다. 피붙이인 그에게 자애했던 것은 손꼽을 만큼 드물었으나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살리는 길로 내몬 은사 스님의 뜻 깊은 배려라 여기었던 것이다. 그의 강권으로 시작된 참선 공부는 어느 해 준제 기도 끝에 “환희”를 겪고 난 뒤로 백일 기도로, 보현행원 기도등으로 평생을 통해 이어졌다.
그 옛날에 산중에서 탱화불사를 시작할 때는 목욕하고 새 옷 입고, 금토禁土 뿌리고 금줄 친 다음에 신장神將 불공을 올렸었다. 금번불사 종초지말 무상무애 환희원만 성취지대원…그러나 이즈음에는 탱화제작을 청해 오는 절이 날짜도 되잖게 잡고 값도 깎으려 들기 일쑤거니와, 붓을 잡는 이 또한 빼서는 안 될 과정을 생략하고 천연 재료 아닌 화공 약품을 써서 스스로 품격을 낮추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십 년 적공續功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왼다리 바닥에 누이고 오른다리는 무릎을 세우되 단전으로 호홉하는 평온한 자세 만들기, 극세필 선 긋기로 필력을 얻은 뒤에 습화에 들어가되 시왕초, 천왕초. 여래초, 보살초를 각기 천 장이 넘게 그리는 일로 시작한다. 그리기가 어려운 천왕초는 하루에 두 장 그리기가 어려운 것이라 한다.
인연이 그리 되어 있었던지, 출가하자마자 만난 스승 일섭, 은사 스님조차 그의 뜻을 굽히지는 못하고 마니 그를 따라 김제로 가서 이런 과정을 꼬박이 밟는 수련을 한다. 뒷날에 최초의 단청 부문 문화재로 지정되는 스승 일섭의 나이 그 때 마흔둘. 금호, 보응으로 이어지는 호서 불화맥과, 선암사 쾌윤, 송광사 의겸 등으로부터 내려오는 조계산의 호남 불화맥을 아우른 전국에서 가장 평판 높은 불모였었다. 석정 자신이 그리기와 흙과 나무 따위를 조성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금강산 화소의 맥을 이은 석옹 철유가 그린 것들이었으나 , 일섭 은사는 제자로 삼은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그를 인가하고 독립을 시키기에 이른다.
단청, 탱화, 불상 조성 등으로 그 뒤에 펼쳐지는 그의 행장은 이십대 후반까지는 주로 전라도를 주 무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두 은사 스님이 입적처가 되는 통영 미래사로 옮아간 뒤로는 경상도 일대로 그의 불사지가 바뀌게 된다. 그 뒤로 선주산방을 그의 작업실로 삼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경상도와의 인연은 그의 이름으로 이미 예정되었던 모양이다.
스무살 때까지 속명이자 법명으로 쓰던 환경還慶의 뜻을 오늘 그는 그렇게 풀어 보이며 웃었다.
그가 보낸 예순 해 가까운 세월, 그가 조성한 불상은 삼십 위쯤, 건물의 단청과 불상과 불화의 개채도 주관했다 하나 어느 때부터 불화 한 가지에만 매진해 온 나날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경향 각지에 자신이 남긴 작품들은 헤아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은 그의 나이 예순에 이르러 출가 본사인 송광사 대웅보전에 모셔 올린 후불탱화라 일러진다. 그러나 그마저 흡족치는 않은 것이라고 오늘 내치고 만다. 그러나 그 뒤에 조심스럽게 꼽은 것은 뜻밖에 그의 나이 스무살 즈음에 만들어 모셨다는 곡성군 도림사의 나한 탱화였다.
기예보다는 “열성”으로 이야기될 만한 나이이니 일흔이 훨씬 넘은 그가 다시금 자신을 추스리는 바, 긴요한 것은 익숙해진 손끝이 아니라, 그 손끝을 경건히 하는 성심이나 초발심의 마음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수행자로서 평생을 두고 챙겨야 할 만 가지 행의 나침반, 정밀한 정참靜參과 맹렬한 동참動參, 어느 한 순간엔들 마음 닦는 일 게을리 할 것인가. 불화는 몰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일이라, 정진과는 병행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선이나 기도 중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그는 원상圓相을 그리기 시작한다. 좌로도 우로도 그리고, 빨리 시작해서 천천히 돌리기도, 천천히 시작해서 빨리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달마, 한산, 습득, 관음보살, 목동, 난, 대 따위로 발전되었다.
경향의 불사를 도맡다시피 하던 그가, 종회 의원, 주지 등의 소임 모두 거두고, 두 해 동안 참선과 선묵 한가지에만 빠져들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밀양 표충사 뒤에 한계암이라는 토굴을 짓고 “안거”에 든 것이다. 몰입이 되어 힘이 나면 백 장도 넘게 그리게 되는 날도 있더라 했다. 그간에 그려진 것은 수천, 수만?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고, 헤아림도 부질 없는 일이다. 그저 제게 망상이 없어지고 참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그림에 참새가 날아와 앉았던 것은 그 미물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분별이 끊긴 참새의 마음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는 마음이 그러하였으니 보는 이가 그 마음을 읽고 덩달아 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을 터였다.
96년 3월, 서울과 부산에서 이백여 점의 탱화와 선묵 등을 전시해 보인 「석정전」은 일반인에게는 일흔이 된 그가 한평생 이루어 낸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때맞춰 간행된 그의 서화집과, 독학으로 이미 경지에 이른 자작 한시 삼백여 편, 옛 스님의 게송 이백여 편의 원문과 번역문을 담은 시문집까지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쑥스러운 일”로서, 그의 위치로는 피할 수 없는 한국 불화의 보존과 전승의 구체적 실천 작업을 위해 “할 수 없이 동의한” 일이었다. 「한국의 불화」 간행 계획은, 일천오백 국내 사찰에 보관된 오천여 점의 불화를 총망라하는 일과, 계획으로는 개인과 박물관에 소장된 것 그리고 외국어 산재해 있는 것들까지 묶어 보는 일이었다. 간행 편찬위원장으로서, 통도사 성보 문화재연구원 총재로서 원장인 범하스님과 함께 92년도에 시작한 이 일은 방대한 인력과 시간과 경제면이 뒷받침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일을 위한 거금 마련이라는 명분으로 전시회를 동의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화는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독특하고 귀중한 문화재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치명적인 수난이 되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삼백 년의 제작 연대를 넘지 못한다. 그나마 불화 자체 수명의 한계도 문제이지만, 도난, 화재, 사찰주변 환경의 악화 등으로부터 크게 위협 받고 있는 현실을 눈감고 지날 수 없어 시작한 일이었다. 현재 세상에 선 보인 것은 총 발간 계획 마혼한 권 가운데 열두권이다. 그는 이 기획물의 앞머리에마다 총론을 쓰고, 탱화를 해설하는 글을 손수 적었다.
경전을 통한 불법의 깊이 있는 이해 위에 중생 교화의 굳건한 원력으로 제작되어야 할 불화, 작금의 “불화의 퇴보”란 무엇보다 이런 인식의 낮은 수준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실은 한국의 불화간행 이전부터 그가 품고 있었던 것은 그의 그러한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팔만사천 경전 속에서 불화의 요소가 포함된 부분을 모두 발췌 번역하여 한데 묶는 일로 시작될 터인데, 이 일 또한 방대한 작업이라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이에 뒤바뀐 순서일 뿐, “인연이 닿으면 빨리 되는 게고, 안되면 좀 더딜 게고…” 그는 그저 그리 말했다. “제목은 ‘불화’, 아니 ‘불미佛美 지남指南’, 그렇게 될 게구만.”
이십륙 년 병인생이니 올로써 그의 나이 일흔 넷. 유구한 것 한 가지도 남겨 놓지 않는 세월 보낸 뒤라 할 만했다. 그것이 깨우쳐 줄 무상 도리에 한가닥 회한이 없지도 않으련만 오늘 마주앉은 객에게 이런저런 묵은 일들 펼쳐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 혼자 임종 맞으신 어머님이 묻힌 곳, 집은 필경 허물어졌을 터이나 그 터나마 온전하기나 할지. 언제고 한 번은 가 보리라 싶던 마음이 금강산길이 열리면서 오히려 닫혀 버렸다. 제약되는 것이 많아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길이라 하니, 그 옹색한 나들이에 낄 마음은 천만 없기 때문에다. 차라리 그 금강산은 광활한 추억으로 온존케 하리라,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신계사 복원 불사 움직임이 있으니, 혹여 그 불사가 회향된다면, 후불 탱화 한 점은 성심껏 만들어 모시고 싶은 마음 한 가지 있을 따름이다.
산방문을 열고 나오나 그친 듯 싶던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데, 바람에 묻어와 장섬에 달라붙는 젖은 꽃잎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정스님,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객을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