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의 어떤 소년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고은
1996년 12월 178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 하나쯤 없다면 그 사람 무엇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 하겠는가.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따위 없는 삶이 차라리 더 무서운 삶이 아니겠는가.
나는 고려 이전의 출가승처럼 사자師資도 없고 도제徒弟도 두지 않는 그런 시대를 바랄 때가 있다.
무엇 때문에 세속에서의 아버지와 자식, 스승과 제자라는 틀을 산중에까지 질질 끌고 와 또 하나의 집착을 자아낸단 말인가.
사람은 어엿한 조상과 아버지의 가계가 없으면 근본이 없다 하여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 이런 양반네 수작이라도 그대로 시늉하려는 것인지, 심지어 세속의 부자, 모녀 관계 이상으로 은법사와 상좌- 시봉-라는 그런 지나친 관계를 일관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일은 장차 본격적으로 따져 볼 노릇이거니와 , 나는 무사승無師僧의 매혹이야말로 참된 출가자의 본분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당나라 시승 한산 습득이 풍간의 제자라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들 한산 습득의 자취 없는 자취야말로 스승 따위는, 아니 교조로서의 부처님마저도 군더더기일 만큼 산중의 무애를 이룩한바 없지 않다.
이 세상의 알짜 조사祖師는 육조 혜능도 아니고 송광사 제 1세 보조도 아니다. 바로 그런 조사나 국사의 핵심에 들어 있는 \'천진난만\' 그 자체인 것이 아니겠는가.
어째서 사람들은 육조의 제자들 가운데서 회양이 법통을 이었고 하택이 방계가 되었는가 따위에 연연해 하는가.
그런 것이나 따진다면, 이미 법은 십만팔천 리 밖으로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사실도 영 모르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 「수미산」의 한 등장 인물도 본디 근본이 없는 무사승이다. 어디에서 출가했는지, 누가 스승인지 통 알 수 없는 그런 떠돌이 스님이다.
시흥詩興에 겨운 사람이어서 때로는 게송 흉내도 내고는 했다.
어느 밤, 그가 달빛 가득한 밤을 좋아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 스님이 나타났다. 그때는 조선 후기인데 꿈속은 고려 중기였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의 무사승이 꿈속에서 고려 중기의 스님을 만난 것이다. 고려 스님의 법명은 담인淡印이었다.
그 담인스님이 근본없는 조선 후기의 떠돌이 스님을 제자로 삼겠다고
하면서 법명을 지어 주는데 자신의 법명인 담인을 거꾸로 해서 \'인담\'
이라 지어 주었다.
꿈은 시공을 넘나든다. 고려의 스승과 제자에게 근본을 이루어 준 셈이다. 그런데 스승은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고려의 불우한 천재 시인 임춘林椿의 문집이 멸악산맥의 한 산중 암굴 속에 있으니 반드시 그 문집을 찾아다가 세상에 펼치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그 스승과 제자가 성립된 기이한 꿈을 깬 뒤에 새로 법명을 가지게 된 인담은 그 길로 황해도 산중을 향했다.
결국 이런 전설적인 설화도 고려 이후의 출가 사자제도의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현실의 은사와 상좌 사이보다는 훨씬 영험스럽게 느껴진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 효봉 스님이 바로 그이이다. 그러나 그 은사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몇몇 상좌며 손 상좌들, 증손상좌들이 섬기고 있으니 , 나는 스승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소임까지도 그들에게 떠넘겨 버려도 좋겠다.
그렇다면 누가 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1981년 서대문의 서울 구치소 소년감방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박정권 시절의 두 차례, 전 정권 시절의 한 차례, 노정권 시절의 한차례를 아우르면 모두 네 차례 감옥에 쳐 넣어진 사람이다. 80년대 벽두라면 저 광주항쟁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나는 나 자신이 전혀 영문도 모를 내란 음모, 계엄법 위반 , 계엄 교사라는 삼중의 죄목이 들씌워져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지하 2층에서 햇볕 한번 보지 못하는 몇 개월을 보낸 뒤의 극한 상황에서 바로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에 송치되었다.
그때 나는 박정권 말기에 한쪽 귀를 다쳐서 인조 고막 수술을 한 뒤 였고 이어서 또 다른 귀마저 수술해야 했는데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단식투쟁밖에 없었다. 대구교도소 격리 감방에 있다가 서울 육군병원에 와서 다섯 시간 짜리 수술을 한 뒤에 서울구치소에서 의사가 통근하며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 무렵 서대문구치소 특별감방이 모자라고 병감病監에도 나를 넣어둘 수 없었기 때문에 기껏 생각해낸 것이 나를 철딱서니 없는 소년수 전용의 감방하나를 비워 거기에 수감시켰다.
소년수 들은 별의별 범죄 재능이 있는 소년들이었다.
어느날 나는 귀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여서 제법 아함경과 칸트 따위를 읽고 있는데 , 잠시 책을 덮고 건너편 감방을 바라보려니 한 소년수가 자꾸 한쪽 팔을 움직이며 손가락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내 전담 교도관 이 잠깐 내 철장 앞을 비운 사이에 나는 그 아이 에게 말을 걸었다.
\"너 지금 무슨 운동을 하니?\"
\" 아저씨! 나는 쓰리꾼입니다. 몇 년 살고 나가서도 쓰리꾼 노릇을 해야하는데 그 때까지 내 손이 굳을까봐 이렇게 팔과 손을 놀려주는 겁니다.\"
\"과연 그렇구나. 너 어디서 했니?\"
\" 내구역은 명동입니다. 명동!\"
소년수의 자부심은 컸다. 이번에는 그가 말했다.
\"아저씨는 시인이라지요? 요담에 내가 아주 좋은 만년필 하나 슬쩍해서 선물할께요. 그 만년필로 좋은 시를 쓰세요.\"
그 때 교도관이 달려오더니 차마 나를 꾸짖을 수는 없었던지 그 소년수의 건너방으로 가서 소년을 윽박질렀다.
\"이 새끼야! 아구창 꿰매지 못해... 어따 대고 노가리를 까... 저 양반하고 말하면 추가 오 년이야, 임마.\"
이렇게 참담하게 시리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그 뒤로 나는 나왔다. 그 소년수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그 소년은 만날 수 없었고, 그가 나에게 훔친 만년필을 선물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년수를 잊을 수가 없다.
아아! 나는 혜가가 달마를 , 승찬이 혜가를 , 홍인이 승찬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무無! 이따위 수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