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폐사지, 그 이후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원철 1996년 12월 178호
폐사지가 주는 고즈넉함과 무상감은 나름대로 우리의 마음을 맑혀 주는 좋은 법문처 이기도 하다. 깨진 기와 파편, 홀로 남은 탑신, 이끼 낀 축대가 푸른 하늘을 인 절터에 홀로 서 있노라면 또 다른 모양 없는 성지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빈터는 빈터 그대로 영원히 남아 주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영주 부석사 입구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주자학을 이 땅에 들여온 안향 선생을 모신 유교의 중요한 성지이다.
그런데 이 곳이 처음에는 서원이 아니라 사찰이었다. 지금도 탑파의 파편들이 한쪽에 쌓여 있고 안내문에도 절터였음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서원을 만들 무렵에는 아마 폐사지 상태였을 것이다.
국가 역시 그 이기심은 종교 단체나 다를 바 없다. 폐사지라고 해서 마냥 방치해 두거나 필요에 의한 복원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성스러움이 빠져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청주의 고인쇄박물관도 그러한 형태의 한 단면이다. 사실은 흥덕사라는 절에서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경전을 찍은 곳일 뿐인데 \"금속활자 최초 인쇄처\"라는 역사적 사실만 부각시켜 놓았다. 그러다 보니, 박물관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데 법당은 불상하나만 덩그렇게 놓여진 \"불상수장고\"로써 언덕배기에 서 있다.
국가 재산이긴 하지만 법당만큼은 교단에 맡긴다면 절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더불어 박물관도 더욱 그 문화사적인 의미를 더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양주 회암사지 같은 경우는 지금 기독교의 어느 교육재단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웃지 못할 현실이다.
또한 천진암터가 어느날 갑자기 천주교 성지로 둔갑되는 황당한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행여나 앞으로는 금산사 미륵전도 증산교에서 \"우리 성지\"라면서 함께 사용하자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폐사지라고 마냥 방치한 우리의 과보이다. 지금부터라도 개인과 교단의 역량을 모아 폐사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폐사지가 지금의 상태로 보존이라도 될 수 있도록 감시 관리 해야 한다. 혹 새 사찰을 지을 의지와 능력을 가진 원력가에게는 종단 또 는 본사에서 \"폐사지 복원\"으로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복원에 따르는 벌률적 행정적 방해 부분은 개정 또는 폐기시키는 작업도 병행할 일이다. 전통사찰보존법을 개정 \" 이미 소멸된 사찰이라도 사지寺地가 명백히 남아 있는 경우 그 역사적 가치가 있을 때는 복원할 수 있도록 한다\" 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도 급선무이다. 폐사지는 대부분 국유인지라 출토되는 유물도 국가의 소유로 된다. 이번에 감은사지에서 출현한 여러 유물가운데 신앙의 대상인 사리만큼 교단으로 돌려 주었다. 국가의 의식도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이제 폐사지 복원이라는 제 2기 불사시대를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