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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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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상규 1996년 12월 178호
슈마허는 불교의 입장에서 인간보다 상품을, 창조적인 활동보다 소비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전통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물질주의\'로 자칭되는 전통적 경제학이 주로 상품에 관심이 있는 반면, 불교도는 주로 해탈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불교가 모든 경제 활동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에 대한 향락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슈마허에 따르면 불교는 한마디로 \'중도中道\'이므로 부유함에 대해서 적대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박상규님은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비철금속공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 지금은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이며, 연등회 회장이다.

흔히 불교라 하면 지나치게 은둔적이라거나 출세지간에 너무 집착한다거나 하는 말을 주위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산중불교\' 적인 이미지를 일부 대중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산업사회에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교학 체계를 범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야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생명력을 지니고 새롭게 부각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읽는 계기를 통해서였는데 , 그 이전까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도 불교와 현실 경제나 경영을 제대로 연관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서양 경제학자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는 책에서 (이책은 국내에서 나중에「불교와 경제」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
현대 경제에서의 이윤과 성장의 추구가 거대한 조직과 전문화를 가속화시켜 결과적으로 거대 경제 체제의 비능률과 환경 오염, 그리고 노동 조건의 비인간화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슈마허는 경제적 , 기술적, 과학적 전문화의 교리에 도전하면서, 좀더 작은 노동 단위와 소지역의 노동과 자원의 활용에 기반을 둔 이른바 중간 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의 체계를 주창하면서 자본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인간 중심의 경제(Economics as if peopel Mattered)를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내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 관심을 가지고 본 대목이지만 그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끈 내용은 \'불교의 경제학\' 이라는 제하에 전개된 제4장의 내용이었다. 슈마허는 불교의 입장에서 인간보다 상품을 , 창조적인 활동보다 소비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전통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물질주의\'로 지칭되는 전통적 경제학이 주로 상품에 관심이 있는 반면, 불교도는 주로 해탈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불교가 모든 경제 활동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에 대한 향락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갈망이라 할수 있기 때문이다. 슈마허에 따르면 불교는 한마디로 \'중도中道\'이므로 물질적 부유함에 대해서 적대적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면서 슈마허는 현대 경제학자와 불교 경제학자-이러한 말이 학계에서 실제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사이에 또 하나의 차이점은 자연자원을 사용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곧 현대 경제학자는 자연을 단순히 소비나 이용의 대상으로 파악하지만, 불교 경제학자들은 자연을 정복이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의 시각을 빌려 새로운 대안적 경제의 모색을 주장하면서 슈마허는 즉각적인 경험과 장기적인 전망모두에 비추어 보아 불교 경제학의 이론을 경제 성장이 정신적인 또는 종교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 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대적 성장\'과 \'전통의 침체\' 중 양자택일하는 문제가 아니라 발전의 올바른 길, 물질주의자의 부주의와 전통주의자의 부동성不動性 사이의 중도를 찾는 문제, 간단히 말해 \'올바른 생계\'를 찾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소 거칠게 슈마허의 주장을 정리해 보았지만 나의 주된 관심은 슈마허의 주장 자체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돌이키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는 사고가 무의식중에 팽배하여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조화와 타협이란 말은 구두선에 그치고, 여전히 현실 정치는 일방적인 힘의 논리나 권력의 집중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는 또한 지나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 쾌락주의와 말초적 형태가 만연되고 있으며, 자기 과시적인 현시욕에 사로잡힌 소비형태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향은 경제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해결책은 과다한 국가 개입이나 철저한 자유방임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처방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따름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 비구들아, 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 지혜를 생기게 하며,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비구들아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이다.\"
이러한 다섯 사문에게 행한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적어도 승만부인의 열 가지 서원을 잊지 않는다면 , 이상에서 언급한 정치나 사회 영역의 병리도 해소되고 경제 문제도 조화로운 상생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이 팽배하고, 온갖 사조가 급격히 허물어지고, 그어느 것도 이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세기말\'의 도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다. 최근에 기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환경 친화적 사업\' 도 따지고 보면 슈마허가 지적한 대로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녹아내려 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은 나만의 시각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관심은 어떻게 부처님의 중도의 가르침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실천하면서 이를 회향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있으며 , 앞으로 더욱 용맹정진하여 나의 부족한 근기를 채우고자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