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닮는 오월이 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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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찬주
1999년 05월 207호
부처님이 오신 지 이천오백사십삼년. 다시 부처님을 생각해 보는 우리의 마음은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부처님 제지이기 이전에 인간 된 도리로서 면목이 없다. 깨우치면 부처, 그렇지 않으면 중생이라 했다. 깨우치는 길을 부처님께서는 몸소 생생하게 열어 보이셨건만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생으로 머물러 있다.
지난해, 불타는 총무원 사태를 더 들출 것도 없이 악업만 짓고 사는 중생의 현주소를 숨김 없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부터는 손가락질을 자제하자. 따지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는 집이 아닌가.
부처님은 그 때도 중생이 짓는 업을 보고는 이렇게 담담하게 한탄하셨다. 이른바 산상 설법이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신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에서 다시 마가다국의 우루베라 곧 정각을 이루신 곳으로 돌아오신 부처님께서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 수효가 무려 천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그때 부처님은 그 많은 제자를 이끌고 왕사성으로 가기 전에 상두산으로 올라가 상념에 잠기셨다. 산의 정상에 올라보니 정각을 이룬 날의 새벽과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던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윽고 부처님은 많은 제자 앞에서 입을 열어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그 대상을 향해 타고 있다. 귀도 타고 있다. 코도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오르는 것인가. 탐욕의 불꽃에 따라 타고, 성냄의 불꽃에 빼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따라 타고 있느니라.”
그 때 제자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불꽃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 바른 깨달음아라고 믿었을 터이다. 뒤에 사리불과 그의 조카 쟌푸카카와의 문답이 산상 설법의 의미를 잇고 있다.
“사리풋다여, 수행자들어 열반, 열반이라고들 말하는데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쟌푸카다카여, 무릇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한다.”
부처님의 수제자다운 참으로 명쾌한 사리불의 설명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중생의 현상을 말했을 뿐인데, 총명한 사리불운 불꽃의 소멸까지 부처님의 침묵의 말씀까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위대하신 것은 그렇게 해탈의 경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섯 비구에게 망설임 끝에 법문을 하시고, 천여 명의 제자에게 산상 설법을 한 것처럼 지비심을 드러내 보이신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열반경」 범행품을 보면 부처님의 뜻이 더욱 명료해진다.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일으키면 한량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모든 선행의 근본이냐고 물으면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선한 행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진실한 생각이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이 곧 여래이다.”
옳은 말씀이다. 중생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꽃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과육 속의 씨앗처럼 가지고 있는 불성 곧 자비심을 싹 틔우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반면에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꽃을 꺼버린 자비심 그 자체이리라. 그렇다면 탐욕의 불꽃은 무엇으로 꺼지는가 의,식, 주에 대한 집착을 간소화시키는 것도 자비심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리라.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 ‘두타제일’이라고 불리는 가섭의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한다.
가섭은 평생 누더기만을 입고 살았다. 의. 식, 주에 대한 욕심을 극도로 절제하는 수행법을 두타행이라고 하는데, 그 모범을 보인 수행자가 가섭이다. 부처님이 왕사성에서 탁발을 한 뒤에 나무아래서 쉬어 가려고 할 때였다. 가섭은 입고 있던 가사를 벗어 네 겹으로 접어 부처님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러고는 부처님이 입고 있던 누더기를 달라고 하였다.
“세존이시여, 부디 저의 가사를 받아주십시오.”
이에 부처님은 가섭의 뜻을 받아들였고, 가섭은 그 날부터 부처님의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었다. 그러자 다른 수행자들이 가섭을 비웃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것이 부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기원정사에서도 수행자들이 가섭을 보고서는 비아냥거렸다.
“저 수행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 흙과 먼지투성이 누더기를 걸치고 부처님 가까이에 있다니. 부처님 앞에서는 위의를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닌가.”
비웃는 소리는 부처님의 귀에도 들려 왔다. 그 때 부처님은 설법을 중단하고 가섭을 불렀다.
“자, 가섭이여. 여래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줄 터이니 여기에 앉거라. 가섭이여. 너와 여래, 누가 먼저 출가를 했느냐.”
그러자 가섭이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제자입니다.”
“그렇다, 가섭이여. 여래는 너의 스승이고 너는 여래의 제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나와 함께 앉자.”
이 광경을 지켜본 수행자들은 머리카락이 솟구치는 듯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누더기를 입은 가섭을 부처님은 친히 불러서. 그것도 설법을 중단한 채, 더 가까이에 앉게 한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혹시 가섭을 비웃고 있는,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는 아닌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일이다.
다음으로, 성범의 불꽃은 무엇으로 꺼지는가. 부처님은「법구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달리는 수레를 멈추게 하듯 꿇어 오르는 화를 삭이는 이를 나는 진짜 마부라고 부르겠다. 다른 사람은 고삐만을 쥐고 있을뿐.”
「열반경」에 이르기를 ‘창파 칼로 찌르거나 향수와 약을 발라주더라도 두 가지에 다 무심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의 불꽃은 무엇으로 꺼지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지혜에 의해 어리석음의 불꽃은 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거저 얻어지는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부처님의 제자 아니룻다가 지혜를 얻는 과정의 일화는 눈물겹기만 하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할 때 였다. 아니룻다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자 부처님이 아니룻다에게 나직이 꾸짖었다.
“아니룻다여, 너는 왕이 정한 법률을 피하려고 출가했느냐. 그렇지 않으면 도적이 무서워 출가했느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출가했느냐.”
아니룻다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생노병사의 의문을 풀고자 출가했습니다.”
“그렇다. 아니룻다여, 너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출가하여 여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설법하는 동안에 졸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참회하고 결심하였다. 그 날부터 아니룻다는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부처님이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먹이가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단다. 그렇듯 사람의 눈은 잠을 먹이로 한다. 귀에는 소리가 먹이다. 코에는 향기, 혀에는 맛이 먹이인 것이다. 아니룻다여, 이제 그만 잠을 자거라.”
그래도 아니룻다의 정진은 꺾일 줄 몰랐고. 마침내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니룻다는 육신의 눈이 먼 대신에 지혜의 눈을 뜬 것이다.
그렇다. 앞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우리가 부처이지 못한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꽃을 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중생으로 남아 아득한 윤회의 밤길을 끝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오신 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부처님은 눈 밝은 이들에게는 현재진행형으로 오시고 있다. 절제할 줄을 알고, 참을성을 기르고, 지혜를 얻어 우리 모두 부처님을 닮는 불제자가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