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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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오성
1999년 05월 207호
오월이면 햇살은 대지를 만나 세상 가득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오월이면. 우리도, 싯다르타의 탄신을 맞아 햇살 받은 대지처럼, 저마다의 마음에다 등불을 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탯줄을 끊고 아기로 오시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이시매, 햇살도, 우리 마음도 꽃을 가득 피워 싯다르타의 그 뜻을 이으려 하는가 보다.
오월의 아름다운 사람, 싯다르타 그 분은, 그 시대의 사회 풍토와 사장의 흐름을 뛰어 넘는 인내와 용기를 온 생애에 걸쳐 감동적으로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자비로움으로 중생을 다독이는, 참으로 따스한 인간미를 갖고 계셨기에 복덕을 구족하신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참고 견뎌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바의 스승으로서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우리의 가슴에 마다 하나씩 걸어 놓으시고서, 세상을 거울삼아 이 땅에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의 빛을 밝혀 주신 분, 바로 그 분이 오신 날이다. 해마다 이 때를 벌어 비로소 출가사문의 정신을 되새기며 나를 되돌아 보는 계기로 삼는다.
부처님의 삶이 그리워질 때마다 안이하고 권위적인 삶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몹시 부끄러워 진다. 이러한 반성은 비단 나만의 모습은 아닐 터이다. 더더욱 부끄러운 것은 곧잘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여 스승과 도반들을 저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독단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우리네 출가자의 모습이다. 토굴에서, 산에서, 또는 도시에서 자신만의 불법 세계를 만드는 스님들이 적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유언을 아만으로 포장하여 스승 없는 시대를 탓하며 귀의처를 멀리하고 저마다 차별의 세계를 만들어 온 오늘을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정화 이후로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종단의 분규도 이와 같이 우리가 승가의 귀의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사문들이 무슨 무슨 부자이다, 과장이다 하며 직위로써 서로를 부르는가 하면, 또 주지들이 사찰을 제 마음대로 운영하는 일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어떠한 사안이 생겼을 때에 최종 결정을 세속법에 기대는 일도 종종 있으니, 부처님에게서 비롯한 승가의 정신은 나날이 위태로워지다 못해 아예 간 데 가 없어 보일 정도이다.
어찌 보면 진정한 우리의 스승은 바로 대중일 것이다. 대중의 사고, 대중의 결정, 대중의 행위가 우리 출가 사문에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제가 끝나는 날이면 대중을 모아 가장 먼저 자자自恣를 행하시던 권위 없는 겸손함과, 한 수행자로서 자만 없는 구도의 모범 앞에서 우리는 자못 마음이 숙연해진다.
대중은 우매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대중에 의해 역사의 수레 바퀴를 굴려 온 것이 사실이며, 선지자도 대중의 일원으로서 대중과 조화와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앞날에 대해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낳을 수가 없다.
법의 숭고한 평등사상은 대중의 사고와 행위의 본말이다. 진리와 법이란 모두에게 공명하고 모두에게 자애로운 것이기에 대중은 화합하고 평온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과 자세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불교는 세상의 등불로 자리할 수 없고 그럴 값어치도 없다. 몸소 대자대비하심을 보이신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승가이건만 분열과 갈등과 대립을 자꾸 일으킴은 대중을 귀의처로 삼지 않은 데에 그 까닭이 있다.
우리는 스승이 현존해 있기를 바라고 그가 이끌어 나갈 세상을 고대한다.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은 채로 절대적인 확신을 주는 스승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의 이런 모순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즘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끈질기고 꿋꿋한 삶에 우리는 절로 눈물도 흘리고 위안도 받으면서 그래도 아직은 감사하고 환한 웃음으로 보답해 줄 사람이 많구나 하고 마음 한켠으로 뿌듯해 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끄고 뒤돌아서면 여전히 우리는 자신의 앞날과 성취 앞에서 너무도 고집스러워 어떤 것도 놓아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세파에 휩쓸려 간다. 동전을 뒤집는 것처럼 그것이 모순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훌훌 털어 나를 뒤집는다면 혹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스승은 우리 주위에 늘 그렇듯 현존해 있음을 말이다.
어느 날 문득 저 먼 발치에서나, 혹은 내 바로 곁에서 우리의 삶 속으로 다가오는 부처가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천여 년 전 부처님 시대에 사리불과 목건련이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한 탁발승이 걸식하는 모습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였다. 그 시절이었다. 가난한 어느 마을 어귀에서 부처님의 제자 마승馬勝 비구가 탁발을 하고 있었다.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능숙한 말솜씨로 그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용히 그리고 한 톨의 쌀을 얻는 행위에 대한 경건함만이 그의 주위를 헝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리불과 목건련이 한순간 그에게 매료되어 버린 것은 그의 무엇을 보았음일까. 걸식하는 한 제자의 모습만 보고서 그의 스승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자신의 사회적인 명성과 같은 과거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스승을 찾아 나섰던 사리불과 목건련의 안목과 용기가 우리에게 과연 있을까.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와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법과 진리를 향한 순수한 마음과 간절한 구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던가. 전해오는 일화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중생의 눈으로는 부처를 볼 수 없다. 중생은 자기 존재를 버리지 못한 이를 말한다. 「금강경오가해」에서 육조 혜능스님은 “중생과 불성이 본디 다르지 않지만 네 가지 상-존재-을 인연해서 남음 없는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나니 네 가지 상이 있으면 중생이고 없으면 부처다. 이에 어리석으면 부처가 중생이고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다”라고 하였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세계는 나의 거울에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갈등과 대립이 있다. 나에게 주어진 업을 내가 젊어지지 않는다면 우 리는 결코 피안에 다다를 수 없다. 나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고 세계는 나의 확대이다. 나의 수행력과 그 결과만큼 세계는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뺀 그 어떤 곳도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좋은 길이 될 수 없다. 그곳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중생이 바로 나의 도반이며 스승이며 부처임에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존재는 또 다른 나이며 부처이다. 어리석은 중생 가슴에서 참으로 밝고 아름다운 부처의 등불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빛은 어둠의 상대적인 밝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디 갖고 있는 밝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