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사람 되기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 듣기 어려운데 이미 듣나니,
이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리요.
우리가 도(道)를 닦아 성불하기 이전에는 영혼이 있어 자꾸자꾸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것이 소위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천당을 갈 필요도 없고, 극락을 갈 필요도 없고, 오직 사람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초능력 즉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하면 극락이나 천당은 아무 소용도 없고 이 현실에서 무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라고 표현하여 누구든지 이것은 똑같이 평등하게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개발하면 곧 부처이니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불교의 근본진리, 구경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는 영겁불망(永劫不忘)!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일상 생활에서 학문을 익힌다든지, 기술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희미해져 버리지만 도를 깨쳐 도를 성취하면 이 깨친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 내생은 물론 여러 억천만생을 내려 가더라도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에 따르는 신비하고 자유 자재한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곽공보(郭功甫)라는 시인이며 대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시인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 사랑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곽공보의 불교 스승이 누구나 하면 귀종선(歸宗宣) 선사라는 임제종의 스님입니다. 한번은 선사께서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6년 동안을 네 집에 가서 지냈으면 좋겠다.」
「이상하다, 스님께서 연세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 집에 와서 6년을 지내 살려고 할까?」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는데, 문득 자기 부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구,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자다가 왜 이러시오.」
그는 부인을 깨워 물어 보았습니다.
「이상합니다. 꿈에 큰스님께서 우리가 자는 이 방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불을 켜서 내가 보여 줄께 있어.」
그리고서 낮에 온 편지를 부인에게 보여 주였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절에 가 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셨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적(入寂)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열달이 지나 부인은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모든 것으로 볼 때 귀종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선로(宣老)라고 지었습니다. “선 노스님”이라는 뜻입니다. 생후 일년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부터 누구든지 “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나나 제자 취급입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도 큰절을 하고 큰스님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 당시 임제종의 유명한 백운단(白雲端) 선사가 이 소품을 듣고 한번 찾아왔습니다. 백운단 선사를 보고 세살 된 아이가 “아하, 우리 조카 오네” 하였습니다. 전생의 항렬을 치면 백운단 선사는 귀종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하고 어런애에게 절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운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적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스님과 헤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한 4년 되지. 이 집에 와서 3년, 이 집에 오기 일년전에 서운암에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장소도 틀림없습니다. 백운단선사가 보통의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아주 깊은 법담을 걸어 보았습니다. 세살 먹은 아이가 척척 받아 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등록(傳燈錄) 등의 불교 역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선 선사의 재생입니다. 그 후 약속대로 한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불러 놓고,
「본시 네 집에 6년 동안 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난 간다.」
그러고는 그대로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격생불멸(隔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을 바꾸어 태어나도 전생 일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