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내 마음 자리에서 보면 수없이 스러졌다 일어서는 바다의 파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을 바로 알면 몰라도 짐작으로 알면, 이는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먹어야지요.
예컨대 팔만대장경도 서울로 가는 노정일 뿐이지 서울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팔만 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뭐꼬?" 하며 참선만 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지요.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고, 적멸보궁에서보다 원당암에서 "이 뭐꼬?" 하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나갑니다.
참선은 곧 활구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이것 하나를 가르치려고 부처님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중에 들어와야 큰소리를 치고 살 길을 만나는 거지요. 밥먹는 얘기 백날 해야 아무 소용없고, 결국은 밥을 먹어야 먹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도 앞에서는 팔만대장경도 어쩔 수 없고, 부처라는 글자도 보잘 것 없습니다. 부처의 불자佛字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 길"을 만난 겁니다.
수좌首座 스님의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천상 천하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듯 이름 자체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부러울 게 뭐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법을 만났다면, 이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은 없겠지요. 이러한 법을 안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일지라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인간 관계가 터럭끝만도 못한 것인데 사람들은 내 아들, 내 딸 하면서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살겠다고 이름만 빌린 것을 가지고 그렇듯이 어리석게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버릇을 버려 병을 고치지 않으면 온몸이 마르게 고생고생하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자식에게 집착하는 버릇은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부처님 시대에 어느 집에서든 아이만 낳으면 잡아다가 자기 새끼에게 먹이는 귀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귀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그가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막내아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귀신은 애가 타서 부처님을 찾아와서는 "내 막내아들이 없어졌으니 부처님의 도력으로 찾아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너도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왜 사람의 아이를 잡아다가 네 새끼들에게 먹여 남의 애를 먹이느냐?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고 싶거든 이제부터는 사람을 잡아다가 먹이지 말아라" 하시며, 바릿대에 담아 두었던 귀신의 막내아들을 내어주더랍니다. 이때부터 귀신은 바릿대 물을 먹고 살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사람이나 귀신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자식에 집착하여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얼핏 보면 부모와 내가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상 멀고 먼 관계입니다. 늘상 나를 따라 다니는 내 몸도 나와 거리가 먼데, 하물며 부모야 말해서 무얼하겠습니까? 본래 자리에서 보면 부모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가 생기기 이전부터,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는 있었어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으니 육체로 보아서는 부모와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지만,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닌 것을 안다면 부모다, 자식이다 하여 집착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을 모르고 중생들은 내 부모, 내 자식에 끄달려 죽을 길만 찾아다니니, 부처님 법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바른 법을 깨우치겠습니까? 또한 이 문중에 들어서지 않으면 이 법을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그만큼 이러한 정법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대구 관음사에 법문을 하러 갔다가 주지실에 잠깐 들렀는데, 그 방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어요.
삼생원가三生怨家
윤회본인輪廻本因
효봉 스님의 손자 상좌인 관음사 주지 스님의 말이, 효봉 스님에 예전에 동화사 조실로 계실 때에 써 놓은 여러 현판 가운데에 하나인데, 나중에 현판식을 하려고 찾아보니 이 글자만 없어졌다고 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더니 뒤에 방을 고치려고 마루를 뜯다가 마룻장 밑에서 이 글자가 나와 그 주지 스님이 보관했다가는 벽에 걸어 놓았다고 해요.
이 글의 뜻은 살아서 복짓는 일이 전생, 금생, 후생이라는 삼생의 원수요, 윤회의 근본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짓고 살아봐야 나고 죽는 씨앗이 되어 버려 천상의 불구덩이밖에 못 가고, 불구덩이에 가면 도로 지옥에 가지요. 지옥과 천상은 한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만이 고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나고 죽으러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뼈마디가 다 녹아들도록 괴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나고 죽을 때의 괴로움이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극락세계가 있는데 왜 사서 그러한 고생길을 만듭니까?
중생이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고 길잡이하러 나온 이가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은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고 이 세상에 나온 거예요. 우리도 이를 본받아 부처님의 하인노릇을 하려는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대로가 극락이에요.
부처님의 은혜를 하늘과 땅에 비할 수가 있습니까? 이 한 몸 다 바쳐도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합니다. 도인이 되어 중생을 제도할 때에 그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지. 물질적으로는 갚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가 하도 비싸서 그래요.
말이나 글자에는 도가 없습니다. 참선 열심히 해서 부처가 됩시다. 참선이 없었으면 중될 일도 없었겠지요. 참선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진하기 바랍니다.
이 법문은 해인사 원당암에서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에 실시하는 철야 용맹 정진 시간에 맞추어 혜암 큰 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