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지계의 덕은 수승하니 1997 년 10 월(188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금지수계자今之受戒者는 일수지후一受之後에는
속지고루각束之高樓開하고는 막구기의莫究其義이로다.
오늘날 계율을 수지한 사람들이 한번 받고 난 뒤에는
높은 누각에 묶어 달아 놓고는
그 뜻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는구나.

중국의 율종을 확립한 스님은 도선道宣 율사입니다. 그 스님은 스승에게 계율강의를 한번 듣고 나서는 즉시 사방으로 유람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먼 길은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고 꾸짖으면서 수행의 출발은 계율에 있음을 일러주고는 같은 강의를 되풀이해서 열 번이나 듣게 하였습니다. 도선스님이 하근기下根機도 아니요, 율장의 내용이 난해한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오래 머물게 하면서 열 번이나 듣게 했겠습니까? 이는 계율로 말미암아 도의 근본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골수째 깊이 스며들게 하여 그 견고함을 변치 않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계를 잘 지키면서 열심히 수행하던 도선 율사깨서 한밤중에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어두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실수를 하여 돌계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땅에 부딪치려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옷 입은 장군이 그를 받쳐 주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호법신장입니다. 스님 계의 덕이 높기 때문에 호위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렇게 따라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계는 이처럼 늘 자기의 몸을 지켜 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진晉나라의 도진道進스님은 담무참壘無議 율사에게 나아가 보살계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율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이레 동안 참회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레 동안 억지 참회를 마치고 난 뒤 다시 갔습니다. 그러자 담무참 율사는 크게 화를 내면서 보살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도진스님은 느낀 바가 있어 물러 난 뒤 정성을 다해 예불참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는 날이 삼 년이나 계속되었습나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꿈을 꾸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나투시어 계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음날 담무참 율사를 가서 뵙고는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율사는 축하의 말을 하면서
“그대는 이미 계를 받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참회는 부처님까지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계를 받는다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를 받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제齊 나라 때 승운增雲스님은 보명사寶明寺라는 절에서 살았습니다. 결제하는 날에 포살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계율은 누구나 다 외워서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자주 듣는가?” 하면서 드디어 포살의식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해제하는 날 승운스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중의 큰스님이 보이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대중은 사방으로 스님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리하여 한참 뒤 오래 된 무덤 사이에서 스님을 겨우 찾았습니다. 그런데 온몸에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나운 무사가 큰 칼을 잡고 무서운 소리로 꾸짖으면서 ‘승운아!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포살의식을 폐지하였느냐?’ 하더니 곧바로 칼로 나의 몸을 베었는데 고통을 참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부축을 받아 절로 되돌아온 스님은 정성을 다해 참회하였습니다. 포살의식을 다시 시행한 뒤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 포살의식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도선 율사는 스승에게서 똑같은 계율강의를 열 번이나 들었습니다. 도진스님은 삼년 동안이나 예불참회를 한 다음에 보살계를 받았습니다. 승운스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포살의식에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포살을 강조하고 계율을 이야기하는 것은 수행을 잘하기 위함입니다.

로 어떤 스님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스님께서 홀로 전하신 성품을 바로 가르치는 선법은 문자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계율 이야기를 하셨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마스님께서 계율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는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하려고 그러신 것이며, 둘째로는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했다는 뜻은 달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으로써 종宗을 삼았습니다. 오직 바로 가르치는 것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오頓悟를 가르쳤습니다. 단박에 깨달음의 지리에 그대로 들어가게 했을 뿐이지 단계를 차례로 거치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종지宗旨가 이와 같음으로 계율을 말한다면 오히려 잘못이기 때문에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두번째, 제자들을 믿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달마스님의 문하에는 모두가 상근기의 인재들만 모였습니다. 전생부터 반야의 종지를 익혔으며 또한 최상승의 근기를 갖추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았기 때문에 또다시 계율의 수지受持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엔 계율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굳이 계율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았지만 어느 제자도 계율을 고의로 어기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따로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를 이 산승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계戒로 인하여 정定이 생기고 정定으로 인하여 혜慧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계는 기초이고 도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한몸을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그래서 백장스님은 허다한 위의威儀와 예법體法을 세웠던 것입니다. 스님은 사소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도 빈틈없이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달마 대사의 사람본성을 바로 가르치는 종지에 비교해 보아도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어떤 스님은 대중이 한곳에 모여 살면서부터 총림에 장황한 예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하여 예법의 세세함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에 총림예법의 근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밀입니다. 근본 없이 지엽技葉만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배 스님들도 도제道體를 잃으면 계의 힘이 소멸하고 계의 힘이 소멸하면 총림의 예법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도道로 돌아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진도 결국 계가 바탕이 되어야 제대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철 노사께서도 “수좌오계首座五戒”를 총림대중에 가르쳤습니다. 그 계목戒目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네 시간 이상 자지 말라. 둘째, 잡담하지 말라. 셋째, 정진 중에는 문자를 보지 말라. 넷째, 포식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 일을 하라.
총림의 대중은 수좌오계를 마음에 깊이 새겨 두고 이에 따라서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네 시간 이상 자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촌음寸陰이라도 아껴서 공부 시간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선放禪 중에는 잡담을 하거나 문자를 보는 것은 정진을 방해하는 마장이니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은 도를 이루기 위한 약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알맞게 먹어야 합니다.
과식 포식은 결국 수마睡魔를 부르게 되어 공부를 방해합니다. 이럴 경우 음식이 도를 이루는 양약이 아니라 도를 방해하는 독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 것 다자고 먹을 것 다먹고 시간나면 잡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비하고 도대체 어느 겨를에 공부하겠습니까. 그리고 늘 일거리가 있으면 운력을 하겠다는 자세를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운력도 수행임을 명심해야 합나다. 일을 하라는 것은 남의 밥먹고 내 일 라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절대로 공부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日不作 一日不食’정신으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산승도 토굴에서 혼자 정진할 때 하루에 나무 한 짐씩은 꼭 했습니다.

약산藥山스님에게 고씨 성을 가진 사미승이 하직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릉으로 계를 받으러 갑니다.”
“계는 받아서 무엇을 하려는가?”
“생사生死를 면하고자 합니다.”

이 대중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계도 받지 않고 생사도 면하려 하지 않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억(喝)!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