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거륙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1997 년 7 월(185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산승山僧이 스물네살 되던 해 가을에 있습니다. 지금 나이가 칠십하고도 셋이니까 오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백양사에서 여름 살림 해제를 하고 해인사로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해인사에서는 효봉스님을 모시고 가야총림을 가꾸어 갈 때입니다. 그 회상會上에서 공부를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침 객실에서 해인사에 가려는 객 스님 한분을 만났습나다. 그 스님께 해인사까지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고, 백양사에서 가까운 곳 말고는 먼 길을 다녀 본적이 없어 해인사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만행중인 그 스님의 동의를 얻어 따라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문경 봉암사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스님들의 사는 모습을 보니 너무 신심이 났습니다.
그 곳 스님들은 장삼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바로 이 장삼입니다. 보조스님이 입었던 장삼이라고히여 ‘보조장삼’ 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사도 화려한 비단가사 대신 과색의 소박한 가사를 수하고 있었습니다. 바루도 그 무렵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복바루 대신에 와바루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생활하는 모습이 너무도 반듯해 보여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같이 갔던 그 스님에게 “여기서 함께 사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규칙이 까다로와서 살기 힘들겠다” 하고는 떠나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종수스님이 입승을, 성수스님이 지객 소임을 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고 방부를 드리겠다고 하니 큰스님에게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성철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일도 많고 규칙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늘 장삼을 입고 생활해야 하는데 할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여 방부를 허락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봉암사 결사”의 한 구석을 산승이 차지하는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산승의 중노릇은 새로운 계기를 만났고 성철 노사를 비롯해 청담스님, 향곡스님, 자운스님 등 많은 선지식을 만나 참선 공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공부대로 그리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하니 딴 생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여건이 화두일념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배겨 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밭매고 산에가서 나무하고 탁발하고 그리고 공부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 때 산승의 화두는 “타사시구자拖死屬句子” 곧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 였습니다. 이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남들은 얼마간 용을 쓰고 나야 비로서 화두가 제대로 들린다는데 나는 앉자마자 바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일곱달을 화두가 성성한 경지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날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 지면서 뭔가 경계가 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다 가끔 소견 난 소리를 한마디씩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아마 그 무렵의 원주 소임을 보던 응산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성철 노장님께 “법전法傳 수좌가 아무래도 경계가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점검을 해 보라” 고 귀띔을 한 모양입니다. 하루는 불려갔습니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 한마디 일러라.”
그러시길래 오른쪽 주먹을 내보였습니다.
“다시 일러라” 하시길래 이번에는 왼쪽 주먹을 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말로서 다시 한번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아이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번 일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꽉 막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뒤 쏟살같이 다가와 나를 문밖으로 밀쳐 내더니 마루 앞 세숫대야 물을 머리에다 퍽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놀라서 “윽!”하는 소리가 큰방에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사건은 그날 저녁 큰방에서 벌어졌습니다. 노장님이 냅다 큰방으로와서 문을 확 열어제치고뚜벅걸음으로 들어와서는 어간에 앉은 스님들에게 “밥값 내놓아라. 밥값 내놓아라” 하면서 손찌검과 멱살잡이가 오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와중에 주변의 스님들은 엎어진 향로의 재나 쏟아진 다기물을둘러쓰는 등 야단이 나버렸습니다. 찰라의 일이었습니다. 너무 돌발적이라 큰방의 대중은 영문도 모르고혼비백산하여 사이문으로 도망치다가 몇몇 스님은 허리나 다리를 다쳐 치료하느라 여러 날 고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노장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나” 하면서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만이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혼자 속으로 빙그레 웃었습니다.
내가 몸이 시원찮아 쓸데없는 꿈이 많았는테 그 날로부터 잡된 꿈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낮에 열심히 정진한 날에는 꿈에도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경험해 보는 참 희안한 일인지라 그 법열法脫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철 노사께서는 납자를 제접하는 방법이 유달랐습니다. 앉아서 졸거나 방일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고함을 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몽퉁이로 내리치시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끌어다가 봉암사 계곡으로 처박아 버리곤 했습니다. 멱살잡이 하여 끌고 갈때 힘이 부치면 나를 불러서 오라고 하여 뒤에서 밀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장님은 앞에서 잡고 나는 뒤에서 밀고 하여 여러 스님을 물속에 빠뜨렸습니다. 공부를 시키고자하는 노장님의 경책은 언제나 이렇게 서슬이 시퍼랬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육이오로 인하여 대중은 봉암사를 떠나게 되었고 산승은 노장님과 함께 고성 문수암, 월래 묘관음사를 거쳐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안정사 천제굴에서 함께 정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성철 노사께서 영가泳嘉스님의 증도가覆道歌를 베껴 와서는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구절이 “군불견君不見가?’였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하면서 시작하는데 첫 구절부터 그 말이 와 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힐끔 한번 쳐다보곤 그냥 방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또 와서 증도가를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군불견君不見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한테 그렇게 묻는다면 등가죽을 차버리겠습나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정신이 맑구먼!” 하면서 방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봉암사 시절부터 이런 기특한 일이 몇 번 있고 난 뒤 타고난 선근善樓이 조금 있어 보였는지 어느날 “내 상좌해라” 하면서 종이에다가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써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부터 정식으로 은법사恩法師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1951년의 일입니다.
하루는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가의 법맥이 어떤 것입니까?”
“법맥이 곧 인맥이니라.”
“스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나의 은사는 동산東山스님이니라.”
그 때 다른 한 스님이랑 함께 시봉했는데 그 스님도 떠나버리고 결국 나 혼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밥하고 국끓이고 반찬 만들고 상차려 드렸습니다. 솜씨가 괜찮았는지 ‘내가 어디가서 이렇게 맛있는 것 얻어 먹겠나” 하면서 맛있게 드시곤 했습니다. 빨래하고 불때고 청소하고 약달이고 하루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약은 달이다 보니 바빠서 시간을 제대로 못맞추어 양이 들쭉날쭉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약단지를 공중에 매달고는 나뭇가지를 비스듬히 하여 저울대처럼 말아서 추를 달았습니다. 약이 졸아져 추무개와 같아지면 수평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약이 달여져 원하는 양이 되면 평행이 되는 것을 멀리서도 볼수 있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약을 달일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늘상 같은 농도 같은 양으로 어른이 드실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수십 년 흘러 다른 상좌들의 약시봉을 받을 때마다 노장님은 “법전 수좌 발꿈치 만큼이라도 따라가라” 하면서 혼낼 때마다 ‘저울추 약탕기’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무슨 신심인지 벽발산碧鉢山 넘어 통영읍까지 시장 보려고 지게를 지고 가면서도 장삼을 입고 다녔습니다. 혼자서 대여섯 사람몫을 하면서도 저녁이면 참선 공부해 보겠다고 애를 썼습니다. 요새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상좌들을 두고 시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무리하게 시켰다하면 이튿날 전부 몸살을 해서 야단입니다. 나는 노장님만큼 마음이 독하지 못해 그런 날은 그냥 좀 쉬도록 일부러 일도 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스승 노릇하기도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일어납니다.

삼가 노사께 한 줄기 향을 올립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