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1997 년 11 월(189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진秦나라 예주曳州 방림리方林里에 두 동자가 함께 발심하여 집을 나와 임야사林野寺로 출가하였습니다. 한 아이의 이름은 종심이요, 다른 아이의 이름은 달정達浮이라 불렀습니다.
이 두 동자가 태양산太陽山 서봉西峰 아래 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초암草庵을 만들어 정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견성見性해서 많은 중생을 교화하기를 발원하고 고락苦樂을 같이 나누며 목숨을 걸고 수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불행히도 달정은 도를 깨치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종심은 그 뒤에 남전스님을 만나려고 지양池陽 땅으로 갔습니다. 마침 누워서 쉬고 있는 남전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곳에서 왔는고.”
“서상원瑞象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코끼리를 보았느냐?”
“상서로운 코끼리는 보지 못하고 누워 있는 부처를 보았습니다.”
“네가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주인이 어디에 있느냐?”
“동짓달이 매우 춥사온데 화상은 존체만안尊體萬安하소서.”
이에 남전스님이 듬직하게 여겨 입실을 허락하였고 뒤에 육조, 남악, 마조, 남천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전수하게 됩니다. 도를 깨닫고 동관음원東觀音院에 머물면서 달정이가 이 세상에 환생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20살이나 사셨으나 기다리고도 남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달정은 환생하였고 그리고 또 출가를 하였습니다. 수행자는 수행자의 인연으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법명은 문원文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문원 수좌가 개를 안고 와서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에 조주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없나니라.”
이 말 아래 그 자리에서 문원 수좌가 도를 깨쳤습니다.
이로부터 천하의 납자들이 모두 “조주가 무엇 때문에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라는 화두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는 많은 공부인이 참구해 오고 있습니다. 이 산승에게 화두를 타러 오는 납자들에게도 이 공안을 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수행자들은 개하고 인연이 많은가 봅니다.
당나라 때 지개智凱스님이 소용천사小龍泉寺에서 머물 때의 일입니다.
당시 남쪽 월越나라 지방의 풍속에는 개가 새끼를 낳으면 길가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님은 이를 가련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는데 급기야는 30 ~50마리에 어르렀습니다. 이불을 같이 덮고 함께 누워 있으면서도 더러움을 싫다 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에는 구계외도狗戒外道라는 고행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개가 죽어서 천상에 나는 것을 보고 개가 하는 짓이 천상에 태어나는 인因이 된다고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처럼 문 밖에서 자고 똥을 먹는 것을 수행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구심狗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조금 얻고서도 만족하게 여기는 범부의 마음을 비유하여 '개 마음' 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한로축과韓擄逐塊 즉 '흙덩이를 쫓아가는 한씨네 개’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사자교인獅子咬人 즉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무는 것이 아니라 던진 사람을 무는 데 반하여 개는 어리석어서 흙덩어리를 물러 간다는 말입니다.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정작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히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뒷날 어떤 스님이 다시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었습니까?"
"았나니라"
"있다면 어째서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범했기 때문이니라."
다시 어떤 스님이 또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나니라.”
"일체중생이 모두가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개는 어째서 '없다' 합니까?"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그 유명한 무자공안無字公案의 전말입니다.
오직 이 무자無字의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을 통과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직접 조주스님을 뵙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얼굴을 맞대어 그들과 똑 같은 눈으로 보고 똑 같은 귀로 듣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360개의 골절骨節과 팔만사천의 모공毛孔을 총동원하여 자기 온몸을 하나의 의심 덩어리로 하여 무자無字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밤도 낮도 오로지 이 무자만 참구해야 합니다.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이 무無를 참구할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흔히 무지십종병無字十種病이라고 합니다. 무자無字 화두의 무無에 대하여 상대적인 유有와 무無라는 분별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 된다니 무슨 다른 도리가 있는가' 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육근六根의 생각을 가지고 '이런가 저런가' 하고 혜아리지도 마십시오. 법문하는 사람의 주장자나 할喝 또는 방棒 또는 몸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알아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말이나 이론으로 짜맞추어 알아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아무 생각 없이 우두커니 있지도 말고, 화두의 깊은 뜻을 참구하는 바도 없이 그저 드는 것으로 무슨 수를 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경전 어록 등 문자로서 증거를 대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또 무無에 대하여 정말 무無한 것이거니 하지도 말고, 마음 속에 깨달음에 대한 기대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속에서 늘 공부하고 마음을 활발발하게 하십시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라는 화두를 마냥 참구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악지惡知나 악각惡覺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수행의 시기가 익어지면 자연히 마음과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기력을 다해 무자無字에만 집중하십시오. 그래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정진하면 법法의 초에 불이 붙어 환한 경지가 나타날 것입니다.
무자無字 공안으로 정진하다가 나타난 경계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운문종의 덕산연빌德山緣密스님 회상에 응진應眞이라는 수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근기가 매우 예리하였습니다. 구자무불성화를 들고 오랫동안 공부하였는데 별다른 진척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홀연히 태양만큼이나 커다란 개 대가리가 입을 벌리고 자기를 잡아 먹겠다고 덤벼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고는 겁이 나서 자리를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이를 보던 옆사람이 도망간 까닭을 묻자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어른한테 가서 여쭈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덕산 선사에게 가서 묻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단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가 개가 입을 벌리거든 그 때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거라. 그러면 없어질 것이다.”
그는 가르쳐 준 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밤중이 되어 개가 다시 나타나 입을 벌리자 달려가듯이 머리로 힘껏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거긴 다른 곳이 아니라 나무괘짝 속이었습니다. 이에 확연히 깨닫고 뒷날 문수사文殊寺에 나아가 불도를 크게 떨쳤습니다.

사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개에게 불성이 없는가 하는 두 토막은 같지 않거늘 한꺼번에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는 설두雪寶스님이 말한 “하나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둘에는 가닥이 없다”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응천진應天眞 선사는 “곧은 낚시는 사나운 용을 낚고 굽은 낚시는 청개구리를 낚는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바람을 쫓고 향기를 나르는 무리가 마치 사냥개같이 와글와글 설명을 붙이니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이 나겠습니까?
불성이 있다 하고 불성이 없다 하니, 바른 것이 거꾸로요 거꾸로가 바름입니다. 맑은 못의 달을 밟아 문지르고, 눈없는 저울대를 꺾어 버립니다. 물 속에서 불을 피우고, 허공에다가 말뚝을 박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을 씹는 데다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한쌍의 어금니를 굳게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