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어떤 것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1997 년 8 월(186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장경 수탁長慶守卓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이에 선사께서 대답하였습니다.
“날씨가 가물어서 백성의 근심이 되나니라.”

시회결제대중들여여!
이 말은 삼천의 풍운을 다 삼키고 강하江河의 일월을 모두 토해 내는 법문입니다.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음陰도 되고 양易도 되며, 온갖 묘함을 다 꾸리어 남음이 없는 법문입니다. 만 가지 종류를 포함하여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어 백성의 근심이 된다’ 하고 말한 그 한마디가 갑자기 용자재왕龍自在王보살로 변하여 시방세계에 가서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고 번개를 붙들고 우뢰를 흔듭니다.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고 단이슬의 비를 뿌려서, 타는 것은 적시고 목마른 이를 시원하게 하고 마른 것은 무성하게 하고 죽은 이를 살게 합니다. 이 한구절은 본래부터 요동한 적이 없으며, 본래부터 옮긴 적이 없으며, 본래부터 안 적이 없으며, 본래부터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끝없는 창생養生이 장마비를 기다리지만 용이 이 속에 도사리고 있는줄은 알지 못한다 하겠습니다.
금보장錯步障 사이로는 봉련鳳輦을 옮기고, 급명지金明池 안에서는 용주龍舟를 띄웁니다. 파도를 능가하는 한곡조를 아는 이 없는데, 명황月皇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동산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괴로운 일인가?”
그 스님은 대답하였습니다.
“지옥의 고통이 가장 괴롭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다. 가사옷 밑에서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비로소 괴로운 일이니라.”대사大事가 무엇입니까?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생사生死의 일을 말합니다.
곧 생사일대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불도 생사일대사 인연을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였습니다.
제불세존은 중생에게 지견知見을 열어 주어서 청정淸淨을 얻게 하고자 출현하였고, 중생에게 불佛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 하여 세상에 출현하신 것입니다. 중생에게 불지견佛知見의 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열려서 제불은 멸대사 인연을 위해서 세상에 출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유일의 큰 목적인 것입니다.
인생난득人生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몸 받기도 예삿일이 아니며 불법 만나기도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닙니다. 다행이 우리는 전생의 선근 인연으로 인하여 사람 몸을 받았고 이렇게 또한 불법을 만났습니다. 더욱이 출가 인연까지 만나 이렇게 가사옷까지 두르고 있으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옷 밑에서 금생에 대사를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과로운 일입니다. 청나라의 순치 황제는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가사 옷을 얻어 입었습니다. 왕노릇도 생사일대사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노릇은 명리를 위하거나 잘 먹고 잘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님 노릇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확탕노환기하반 鐘場盧歲幾何般고
지옥삼도미고산 地獄三途未苦酸이로다
수청동산친절어 須聽洞山親切語하라
가사지하막만우 架裟之下莫觸旴이니라
확탕과 노탄의 고통은 몇 가지인가
지옥과 삼도의 고통은 아직 멀었다
동산의 친절한 말 들어보아라
가사옷 밑에서는 속일 수 없나니라.

서천西川의 향림원香林院 정원燈院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여하시납의하사如可是衲衣下事닛고. 어떤 것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납월화소산臘月火燒山이니라. 섣달 불이 산을 태우느니라.”

향림 징원스님은 청원스님의 문하로서 운문 문언 선사의 법을 이으신 분입니다. 그 때의 운문스님은 광동의 남쪽지방에서 교화하였는데 향림스님은 멀리 서촉지방에서 왔습니다. 운문선사를 만나기 전에 호남의 보자 광화普慈羅化스님을 먼저 참방하였고, 그 뒤에야 운문스님의 회상에 이르러 십팔년 동안 시자를 하였습니다. 운문스님의 처소에서 몸소 체득하고 친히 들었으나 그가 깨달은 시기가 늦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그릇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운문스님은 곁에서 십팔년간 기거하는 동안 늘 “원시자遠待者야?” 하고 부를 뿐이었습니다. 향림스님이 “예!” 하고 대답하기만 하면 운문스님은 “무엇인고?’하고 물었습니다. 향립스님은 그때마다 자기의 알음알이를 써보았으나 끝내 계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제가 알았습니다” 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왜 향상向上을 말하지 않느냐?”
그리하여 또다시 삼 년을 머물렀습니다. 운문스님은 방장실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대기大機의 변론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징원 시자가 그때 그때마다 알아듣도록 깨달음을 얻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운문스님이 했던 말 한마디 글 한구절까지 향렴스님은 간수해 두었습니다.
향렴스님은 그뒤 촉땅으로 돌아가 서천 천왕원에서 주지를 하다가 뒤이어 사천땅으로 돌아가 향림원에서 사십 년 동안 머물다가 여든살의 나이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는 일찌기 이르기를
“내가 사십 년 만에야 바로소 한결 같은 상태를 이루었다”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대중법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하곤 했습니다.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방하려면 안목을 지니고서 모름지기 검고 흰 잣을 잘 분간하여 깊고 얕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 하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뒤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조사의 실내 한 등불입니까?” 하고 묻자 향림스님은 “세 사람이 증명하면 거북도 자라가 된다” 하였습니다. 뒤어어서 “무엇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물으니 “섣달의 불이 산을 태운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듣고 설두 중현雪寶重顯스님은 “섣달불이 산을 태우나 만가지 천 종류로다. 소나무에 앉은 학이 서늘하고 눈을 밟은 사람이 춥다. 달마가 알지 못하니 매우 어렵고 매우 어렵도다” 하였습니다.
태평혜관太平慧動 선사는 이를 받아서는 “점잖은 설두가 형편에 따라 어물어물하여 잘못된 일을 결단치 못했다. ‘섣달불이 산을 태우니 특별한 까닭이 없도다. 솜으로 특별한 돌을 싸고 무쇠로 진흙 덩어리를 싸도다’”하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한참 있다가)
사실 “무엇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하는 물음에 향림스님께서 “섣달의 불이 산을 태운다”라고 한 대답은 겨우 한 말뚝만을 얻은 것입니다.
혹 어떤 이가 “어떤 것이 가사옷 밑의 일입니까?” 하고 이 산승에게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것입니다.
“뼈가 여의어서 장작 같구나.”
여러분이 만일 이 한구절에서 깨달으면 천 구절 만구절이 오직 한구절이요, 천 마디 만 미디가 오직 이 한 마다요, 천 말 만 말이 오직 이 한 말이요, 천 인연 만 인연이 오직 한 인연일 것입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한 납자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한마디 게송을 더 이르겠습니다.

골수여시지자지 骨獲如架只自知라
자지방감동순피 自知方敢鍾庸皮로다
구리해작남산호 騙裡解作南山虎하고
라구번성사자아 癩狗翻成獅子兒로다
뼈가 여의어 장작 같음을 스스로가 알 뿐이니
스스로 알고 나서야 비로소 입술을 놀린다.
삵쾡이를 몰아 남산의 뱀으로 만들 줄 알고
개에게 종기를 만드니 도리어 사자 새끼가 되었도다.

억(喝)!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