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東擇이라. 단막증애但莫增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는 말은 삼조승찬增瓚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인 동시에 근본골자입니다.
낭야각 선사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ꡒ신심명은 불교의 근본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를 내려 주십시오ꡓ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사께서는 ꡐ지도무난어요 유혐간택이니 단막증애히면 통연명백하리라ꡑ 하는 첫 구절만 큼직하게 쓰고 그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註解로 붙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 뿐 같은 뜻이라는 밀입니다. 낭야각 선사가 앞 네 구절만 크게 쓰고 뒷 구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千古의 명 주해로써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극한 도란 곧 무장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나,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은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간택하는 마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곧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주스님께서 시중示聚하되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나 간택하는 것만은 꺼리나니 말이 있으면 벌써 간택이며 명백함이 된다. 나는 명백한 축에는 들지 않으니 그대들 아껴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이미 명백한 축에 들지 않는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ꡒ나도 모르노라“ 하니 그 스님이 다시 묻기를 ꡒ회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명백한 축에 들지 않는다고 하십니까?ꡑ이에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문답은 되었으니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 하였습니다.
어떤 스님이 천동각天童覺 선사에게 이 법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도대체 조주스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꿰맨 자리가 없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아느니라.”
“그 당시의 ‘이미 명백한 축에 들지 않는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냐?’ ‘모른다ꡑ 라는 문답은 마치 사나운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격입니다.”
“오늘 또 한가지를 보태는구나.“
“학인이 그때 그 중이었다면 방석을 들어 올리기만하고 말하기를 저는 평상시에 화상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 역시 문門 위에 문짝을 덧붙이는 짓이로다.”
“그 당시의 ‘화상께서 모른다면 어째서 명백한 축에 들지 않느냐?’ 문답은 되었으니 절이나하고 물러가라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못(釘)부리 무쇠 혀이거늘 어찌하여 부끄러워 하면서 그만두었습니까?”
“나도 알수가 없도다.“
“거기에 설명을 붙일 곳이 있습니까?”
“나천동각이 설명치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설사 조주선사라도 역시 덜미를 잡히리라.”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고 여겼더니 수염 붉은 오랑캐도 있다는 격이겠습니다.”
“단지 그 한 구절이 약간 나은 듯하구나.”
“화상은 조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나 천동각은 습주隰州 사람이 아닌가?”
“해바라기는 해를 향하고 버들솜은 사람을 따르는군요?”
“평상시에 아무일 없는 것이 좋거늘 공연히 헛소문을 퍼뜨리는구나.“
납자가 철저히 공부를 쌓다가 평온히 풀어버리면 자연히 걸음걸음에 헛 공부를 하지 않게 되고 구절구절에 헛말을 뇌이지 않게 됩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나 오직 간택하는 것만이 잘못입니다. 간택함에도 떨어지지 말고 명백함에도 떨어지지 않고 일체 것을 놓아 버리면 어디 그렇게 여러 가지 떨어질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납자들이 불법佛法이나 참선도參禪道라는 견해가 있기만 하면 방망이를 지독하게 맞아야 할 것입니다. 조주선사께서 “나도 모르겠다”라고 한 그 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원래 안다는 소견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택과 명백을 그대 스스로 살펴보고 그 속에서 간택과 명백을 벗어나면 조주스님의 뜻과 부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제일상월하天際日上月下 하고 함전檻前에 산심수한山深水寒이로다. 하늘가에 해가 뜨자 달여 지고, 난칸 앞에 산이 깊고 물은 차구나. 촉루식전희하립觸髏識盡喜何立고 고목용음소미건枯木龍吟消未乾이로다.
해골바가지의 의식 다하니 기쁨 어찌 비기며 , 마른 나무에서 용이 읊조리니 새로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라는 이 두 구절이 환히 트이면 바로 명백을 벗어나는 시절이며, 조주가 애쓴 경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천동각이 말한 꿰맨 자국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해지심似海之心하며
여산지고如山之高로다
문맹 蚊蝱이 농공리맹풍弄空裏猛風이요
누의감어철주 螻蟻憾於鐵柱로다.
간혜택혜당헌포고揀兮擇兮當軒布鼓니라.
바다의 깊음 같고
산의 견고함 같다.
모기 등에가 허공의 바람을 희롱하고
개미떼가 무죄기둥을 흔든다.
가리고 고르는 짓이여.
마루 끝의 베로 메운 북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