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

도림 법전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동안거결제법어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
(十方同共聚)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제목 : 어떤 것이 삼보三寶입니까? 1998 년 2 월(192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삼각산두조령고三角山頭祖令孤 하니
가증유의교정추可曾留意較精醜라.
귀의화맥귀의두歸依禾麥歸依豆 하니
일립-粒이 인간人間에 불가무不可無보다.
삼각산머리에 조사의 령令이 외로우니
일찍부터 정신 차려 좋고 나쁨 가렸어야 했네
벼와 보리와 콩에게 귀의하노니
한 알이라도 인간에게 없을 수 없느니라.

삼각三角 선사에게 어떤 중이 묻되 ꡒ어떤 것이 삼보三寶입니까?ꡑ
선사가 대답하되 “벼와 보리와 콩이니라.”
중이 다시 묻되 “학인은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말하되 “대중은 흔연히 받들어 가지리라” 하였다.
정엄수淨嚴途 스님은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염拈하였습냐다.
“삼각三角 선사가 삼보를 벼와 보리와 콩이라고 대답하니 용궁해장龍宮海藏에 뒤섞여 수록되었네. 운문雲門이 일찍이 소산疎山에게 물으니 지금에 죽과 밥이 풍족하다 대답했네.”

황벽黃檗스님께서 염관醒官 선사 밑에 있으면서 예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나라 선종宣宗 황제가 사미승으로 있었는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승增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라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무엇에다가 예불을 하십니까?”
“불에도 법에도 승에도 구하지 않고, 다만 늘 하는 예불을 하고 있을뿐이니라.”
“예불은 해서 무엇합니까?”
그러자 황벽스님은 그 사미승의 뺨을 때렸습니다.
“스님께서는 너무나 거칩니다.”
“여기에 무슨 ‘거칠다’느니 ‘세련되었다’ 느니 할 것이 있느냐?”
그리고는 한차례 더 때렸습니다.
그 뒤 선종이 즉위하여 마침내 황벽스님을 ‘추행사문’ ‘곧 ’거칠은 중‘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재상인 배휴裵休가 이렇게 간언하였습니다.
“세 차례 때린 것은 삼제三際 번뇌를 끊어주려 함이며 법호를 ‘단체斷際’ 라 바꾸어 주십시오.”
이런 연유로 황벽스님에게는 단제라는 시호讀號가 내려졌던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佛이란 자성 自性의 깨달음(覺)이며, 법法이란 자성 自性와 올바름(正)이며, 승僧이란자성 自性의 깨끗함(浮)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우리 선종에서는 자성삼보自性三寶라고 부릅니다.
그려하여 늘 자성삼보로써 스스로 증명하고 자성삼보에 귀의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불佛이란 깨달음(覺)이며 법法이란 바름(正)이며 힘曾이란 깨끗함(浮)입니다. 자심自心으로 깨달음(覺)에 귀의하면 삿됨이나 미迷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욕심이 적어져서 만족할 줄 알며 재색財色을 여읠 수 있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양족존兩足尊일 것입니다. 지심으로 올바름(正)에 귀의하여 생각생각(念念)에 사천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천이 없어지면 인아공고人我貢高 탐애집착貪愛執着이 없어지는데 이를 이욕존離欲尊이라 합니다.
자심으로 올바름에 귀의하여 일체진로一切塵勞와 애욕의 경계가 자성에 염착梁着 되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합니다. 만일에 이러한 행行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스스로에게 귀의하는 곧 자귀의 自歸依입니다. 자성의 부처(自性佛)에 귀의하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은 쇠로 만든 부처님(金佛)은 용광로를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님(木佛)은 불을 건너가지 못하며 ,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泥佛)은 물을 건너가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참부처는 마음속에 앉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사람이고 만사람이고 모조리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이는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절대로 마음을 병들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음 이것을 고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도 이 성품은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라도 이 성품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성불은 용광로도 지나갈 수 있고 불도 지나갈 수 있으며 물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정불을 어찌 바깥에서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밖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산승도 부득이 하여 법문을 하긴 하는데 내 말을 쫓아 이해하려고 하여 천차만별로 질문과 논란을 던지려 한다면 말재주만 늘릴 뿐 도에서는 더욱 멀어집니다. 그러니 어느때나 제대로 쉴 날이 있겠습니까? 만일에 이 생사일대사가 말에 달려 있다면 부처님께서 사십구년 동안 삼백 회를 설해 놓고도 어째서 한마디도 하신 것이 없다고 하였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외 별전을 말했겠습니까? 배워서 이해하는 지혜로 비구름같이 자유자재로 설법할 수 있는 십지 보살도 견성의 입장혜서 본다면 비단으로 한겹을 가리고 보는 격이니 꾸지람을 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쨌든 마음에 무엇이라도 있으면 모두가 천양지차天壞之差만큼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섭 존자는 법 에 대하여 이렇게 송했습니다
법법본래법法法本來法
무법무비법無法無非法
하여일법중何於一法中
유법유불법有法有不法
법을 법이라 할 때 그 본래 법은
법이라 할 것도 없고 법 아니라 할 것도 없으니
동일한 법 가운데서
어찌 법인 것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무엇을 청정심이라고 합니까? 취항도 없고 집착함도 없는 것입니다. 취하고 집착함이 없고자하면 모름지기 지혜의 눈이 열려야합니다.
그리하여 능소能所 곧 주체와 객체 그리고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청정심인 것입니다. 운문선사는 세 종류의 승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승려는 설법을 듣고 깨달았고, 한승려는 부르는 소리 끝에 깨달았으며, 또 한승려는거량하는 것을 듣고 바로 되돌아가버렸다.’ 했습니다.
심청정즉불心淸淨則佛 마음이 청정한 것이 진정한불佛이며, 심광명즉법心光明則法 마음이 빛나 밝음이 진정한 법法이며, 정광무애즉승i爭光無碍則僧 깨끗한 광명으로 걸림이 없는 것이 진정한 승僧인 것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에게 어떤 중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ꡐ가슴을 드러내고 발을 벗었느니라.“
중이 다시 묻되 “어떤 것이 법입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크게 사면赦免하되 놓아주지는 않느니라.”중이 또 묻되 “어떤 것이 승僧입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고기잡이 배 위에 사謝씨의 셋째 아들(三郞)이니라.”

이 세 마디 깊은 법문에 한마디 한마디마다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 없는 묘한 이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이찰 가려내기만 한다면 이 산승은 그에게 한쪽눈(-隻眼)은 갖추어졌다고 허락할 것입니다.

억(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