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성관 혜암스님


성관 혜암스님

성관 혜암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제목 : 나를 보려거든 네 마음을 보아라(1) 1994 년 2 월(144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오늘은 처음 도 닦을 때 발심을 내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제 큰절에서 보살계 법문을 하고 오늘 아침 수계식을 마친 다음 계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법문을 하기 전에 심지법문을 해달라고 하여서 간단히 몇 마디 했습니다. 많이 듣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반면에 그것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도를 닦는 법이 무엇인가 분명히 안다면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어떻게 많이 배운 것이 허물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할 것이다.
달마스님 말씀에 다문다지多聞多知면 신기가 전함이라는 말이 있어요. 곧, 많이 듣고 많이 배우면 정신이 어지럽다는 뜻입니다. 이 도라는 것은 많이 알고 말을 잘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역자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말귀만 알아들으면 도를 닦을 수 있고, 또 먼저 깨칠 수가 있답니다. 정신이 어지럽지 않기 때문이에요. 도는 세상 공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글자나 말은 귀중하면서도 귀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글이나 말로 배우지 않으면 배울 길이 없거든요.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을 떠나 제 생각대로 말을 하는 것도 마구니 권속이라 하고, 부처님 말씀 그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부처님을 등지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어요.
묘리는 오직 판단을 바로 하는 데 있습니다.
어제 큰절에서 궁현당 상량식을 했는데, 거기에서 무슨 법문을 할까 생각하니 저절로 법문 할 내용이 떠올랐어요. 상량식에서 간단히 식만 거행되어 법문은 하지 않았지만, 바로 다음에 있었던 보살계 법문에서 상량식을 생각해 두었던 얘기를 했어요.
많이 듣고 많이 배운다고 해서 부처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 구절 반 토막을 듣고서도 열 번, 백 번, 성불할 수 있습니다. 악, 하고 소리지르는 할 한 소리에 깨닫는 사람은 깨달아 버려요. 주장자를 한번 탁 올리는 데에도 깨닫는 사람은 깨닫습니다. 이 법문이 참 비싼 법문이 가장 가득히 들어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여러 말 듣는 것보다 여기에서 깨달아 버립니다.
법사스님이 여기, 단상에 올라온 이것이 말로 도를 설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법문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슨 물건이 있어 송장이 주장자를 드는가 이 말입니다. 까닭없이 이렇게 주장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리고 이렇게 척 주장자를 올리고, 때로는 단상 밑으로 던지기도 하는데, 무슨 물건을 던지냐 하는 이치는 똑같습니다. 도는 선 자리, 누운 자리, 걸어가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 무슨 책이나 법당, 마음 밖에서 도를 찾으려고 하면 허공 끝이 다하도록 공부를 해도 도의 맛을 보지 못해요. 어떤 사람이 봄소식을 들으려고 몇 날 며칠을 산으로 천지를 헤매다가 돌아오니까 집 뜰앞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 있더랍니다. 그 사람이, 봄이 이렇게 가까운 데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그리 높은 산을 헤매었구나 깨달았던 것처럼, 도는 여기 앉은 자리, 마음 속에 있어요.
그래서 내가 어제 법문을 할 때 그랬습니다. 범부 분상에 있어서는 사는 것도 꿈이고 죽는 것도 꿈일진대 집을 중수하려고 이렇게 다 뜯었으니, 집을 뜯는 것도 집을 집는 것도 허망한 짓이라고 말입니다. 선악과 시비를 떠난 본분사의 자리에서 보면 모두 허물인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한 것도 허물인데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모두 허물이예요. 망상으로 하기 때문에, 착한 마음도 느닷없이 나왔다가 없어졌다 하는 놈이라 허망한 것입니다.
허공과 같이 변하지 않는 참된 내가 있어요. 구름은 없어지고 변하는 것이지 참된 내가 아닙니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꿈도 아니고 허망치도 않은 놈이 무엇입니까. 한 물건이 있는데 이게 무엇입니까.
많이 들어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 여러 차례 입안에 넣지만, 음식 맛을 아는 것은 혓바닥이 숟가락이 아닙니다. 혓바닥이란 놈은 한번만 떠 넣어 줘도 맛을 다 알 듯, 법문을 들을 때 한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열 번 듣고도 모르는 사람보다 귀중한 사람입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알아들으려고 애를 쓰면 오늘 달라지고 열 번 들을 때 달라지고 백 번 들을 때 달라져요. 거울이나 놋그릇을 닦을 때 한번 쓱 닦으면 닦아집니까. 모든 생각을 버리고 닦기만 하면 광명이 나는 것 아닙니까.
악, 하고 소리치는 법문은 산 법문이 가득한 법문입니다. 평등한 법칙으로 보면 돌멩이로 만든 것도, 쇠로 만든 것도, 흙덩이로 만든 것도, 똥덩어리로 만든 것도 모두 부처입니다. 그러나 차별적으로 보면 정반왕의 아들이신 싯다르타가 별을 보고 깨친 뒤, 서른두 가지의 몸을 보이신 부처님도 부처가 아닌데 어찌 나뭇가지, 돌덩이, 쇳덩어리가 부처가 된단 말입니까. 눈으로 불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 참다운 부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닦아야 할 도는 남의 일처럼 보아 버리고 도를 닦는 사람이 없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문병을 가 아픈 사람에게 물었어요.”무슨 병으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느냐”아파 누워 있던 사람이,”중병이 들었는데 제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뵙고 참배라도 하고 싶었다”하고 대답했어요.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나의 이 썩어 가는 육신에 절을 하려고 하느냐? 네 육안으로 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를 보려거든 네 마음을 보아라. 네 마음을 보면 나와 천리를 떨어져 있더라도 나를 보는 것이고, 나와 같이 있더라도 네 마음을 모르면 십만팔천 리를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이 거리가 멀며 부처와 등을 지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섬긴다고 공양만을 올리는 사람은 마음이 부처라고 믿는 사람에 비하면 부처님을 등지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 밖에는 부처가 절대 없습니다. 성불하려면 내 마음이 부처임을 꼭 믿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성불합니다.
전부 연극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불자도 부처가 아니고, 사람이 조작한 부처도 부처가 아닙니다. 평등한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돌멩이도 나무도 부처이긴 해요, 둘이 아니니까, 빨리 내 마음 밖에 부처도 없고, 또 모든 법이 없다는 것을 믿어버려야 해요, 용맹정진을 할 때 보면 말로만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보광불, 보명불, 보정불이니, 35불, 53불을 부르는데 이것은 참선하는 데 비유하면 외도법과 같습니다. 업보로 인한 방편일 뿐이지 참으로 바르게 닦는 길은 아닙니다. 솥의 물을 식히기 위해서 장작불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마음을 안팎으로 닦기 위한 방편이지 정법은 아니라는 말이예요.
내 마음 밖에 없는데, 금강경이다 법화경이다 해서 그것을 제일로 여기는데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또 부처님 말씀에도 알맹이가 있고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뿌리가 귀중합니까. 가지나 잎사귀가 귀중합니까? 뿌리는 귀중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나뭇가지나 잎사귀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뿌리를 귀중히 하는 사람만 인정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신불, 법신불을 거짓 부처, 허망한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보신, 화신은 부처가 아니며, 참다운 부처는 자성입니다. 다른 것은 참다운 부처가 아닙니다. 제불즉시아諸佛卽是我요, 아즉시我卽是 제불법신諸佛法身이니라. 곧 모든 부처가 나요, 내가 곧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니라 이런 말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모양이 없으며 모양이 없는 자가 법을 설한다는 법문도 있습니다.
법문만 늘 들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들었기에 주장자를 들고 내리는 것인가. 이 하나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대중들이 이것 하나를 알아듣지 못해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법상에 올랐다 내려가는 것 자체가 법문을 다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만공스님께서 대중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려고 법상에 올라갔는데, 밑에 앉아 있던 돌아가신 우리 스님이 “착착錯錯, 글렀다 글렀다”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자 만공스님께서 법문을 하지 못하고 내려오셨답니다. 법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만공스님이 우리 스님에게 밑 갔거나 진 것은 아닙니다. 법문을 하지 않은 그것이 바로 법문인 것입니다. 법문法問의 문자는 문 문門자지 들을 문聞자가 아닙니다. 법문은 귀로 못 들어요, 마음이 법인 것이지, 이 마음 하나 잘 쓰면 왕도 되고 하나님도 되고 부처님도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남부러울 게 뭐 있습니까? 부처님 법문만 들을 줄 알고 믿기만 한다면 얼굴 잘 생긴 사람이나 부자, 벼슬에 있는 사람,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 등 부러워할 것 하나 없습니다. 나에게 천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보배가 있는데 부러워할 게 뭐 있습니까. 인과법으로 지금 이 몸을 이끌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 따름이지 언제나 부자는 부자만 되고 못생긴 사람은 못생기기만 하고, 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부처님 법문입니다.
남을 미워하거나 해칠 것이 없습니다. 남이 천대한다고 마음에 부담감을 가질 것 없고, 내 명대로 내 복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받지 못할 판인데 과거의 일, 미래의 일을 가지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 해인사 원당암에 와 법문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람의 몸을 받지 못했더라면 어찌 성인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부자가 아니어도, 미련해도 좋다. 전생의 무슨 복으로 이런 복을 만났는가. 스님이나 속인이나 이런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집착, 편벽, 고집만 가지고 오직 지금 이 시간만 생각해요. 어제도 내일 일도 생각지 않고 지금 이 시간만을 생각하니 수지가 맞습니까? 앞뒤를 모르니까 성인이 볼 때는 날마다 중생들을 위해서 울지 않을 수 없어요.
어제 법문에서 내가 스님네들에게 어쩌다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정법을 받는가 하고 물으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 시대를 잘 만나서 그렇지 다 헤어져 기운 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열매를 주워먹으라고 했지 맛있는 것 먹으라는 대목은 없습니다.
비구계를 받을 때 모두를 이런 물음에 대답합니다. 너 나무 밑에 살면서 공부하겠느냐, 화장실이나 또랑물에서 나온 다 떨어져 남들이 버린 옷을 입고 도를 닦겠느냐고 물으면, 모두 그러겟다고 대답들을 합니다. 또 내가 하지도 못할 일을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나 부끄러운 마음 없이 남들이 대답하니까 그냥 따라들 합니다.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그렇게들 대답합니다.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이 중노릇인데 편안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중인줄 알고 있어요 거꾸로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스님네들은 나무 밑에서 공부하는 것도 수월하다 하여 집도, 의지할 나무 하나 없는 데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비도 덜 맞고 그늘이 있는 나무 밑을 피해 사람들이 죽어 오는 공동묘지나 밖에서 공부를 했어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공부를 했습니다. 옛날 스님네들은 이렇게 계를 지키며 무섭게 도를 닦았는데, 요즘 스님네들은 도를 어떻게 닦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나 중노릇 잘한 스님들을 따라 하지 않으려고 해요. 부처님 말씀대로 중노릇 잘한 다른 스님 따라 공부할 일이지,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계행을 지키라고 한 것은 공부를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복혜쌍수福慧雙修라고 했습니다. 성불을 해도 복이 없으면 제도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 부처님은 미륵부처님보다 복을 적게 지어 중생을 많이 제도하질 못했답니다. 미륵부처님은 얼마나 복을 많이 지어 놓았는지, 앞으로 용화에서 성불을 하면, 한번 법문에 몇 억 인을 제도시켜 도인을 만들어 버린답니다. 먼저 중노릇 잘한 사람 구억중생을 건진다고 합니다. 이차로는 도는 닦지 않으나 성불에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건지고, 삼차로 불사를 많이 한 사람을 제도한답니다. 이렇게 미륵부처님은 한 차례의 법문으로 몇 억 중생을 건진다는데, 우리 부처님은 처음 성불에 다섯 비구만을 건졌습니다. 복으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달이는 성불했어도 아침에 성불해 저녁나절에 없어져 버려요. 중생계에 복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도인이라도 복이 없으면 중생을 건지지 못합니다. 중생을 건지는 것이 목적이므로 복혜쌍수를 해야 합니다. 지혜를 닦고 복을 많이 지어 놓아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없으면 나쁜 인연이라도 지어 놓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야 인연법으로 내생에 제도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단 한마디로 말을 하지 못해 그렇지 부처님 법문을 배워 믿는다면 부처가 되기 전이라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죽는 것도 무섭지 않은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오늘 죽어도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 부처님 법을 믿으면 죽어도 좋은 일만 생기는 데 무슨 이해타산할 일이 있겠습니까.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똑바르게 살다 죽어야 합니다. 사자 새끼가 삼 년이면 어른 노릇을 하게 된다고, 산중의 왕노릇을 하려면 사자새끼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 정법 성불하려는 종혈을 숨겨 놓고 자꾸 인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도인이 못되고 부처가 되지 못하더라도 이것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하루라도 속히 자유를 얻으려면 말입니다. 오늘, 발심을 하게 하려는 법문을 하려고 했는데 괜한 말한 것 같습니다.
단단히 발심, 공부해 부디 성불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