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그 열 달간의 여행‘출산’역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생사일여(生死一如) – 생(生) - 김서리 2016년 12월 418호
종착역에 도착하다

“저기, 우리 아이 맞죠?” “응. 이제 곧 만나겠네!” 멀리 종착역에서 아이의 실루엣이 보인다. 눈 감으면 그 모습, 사라져 버릴까 봐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출산역에 도착합니다. 열 달 동안 임신호를 이용해 주신
고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기차가 덜컹거리더니 빨리 달리기 시작한다. “여보! 기차가 왜 이러죠?” “아마도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건가 봐.” 당황하지 않으려고 숨을 고르며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있는데 열어둔 창 너머에서 꽃가루가 날아들어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기차가 더 세게 달려 양수 강을 건너고 탯줄 넝쿨을 막 넘어서자 어디선가 “응애~”하는 소리가 난다. 순식간에 기차도 세상도 평온해졌고,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임신의 끝이 아이에게는 생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여보, 눈 떠봐”라며 남편이 내 얼굴에 묻은 꽃가루를 입으로 불어 털어준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세상 벚꽃들은 꽃망울을 터뜨렸고 기차는 무지갯빛 쏟아지는 종착역에 와있었다. 철커덕 기차 문이 열린다. ‘아이… 아이는 괜찮을까?’ 《청정도론》의 〈기능과 진리〉장에 “갓 태어난 그의 몸은 예민한 상처처럼 연약하다. 손에 들거나, 목욕시키거나, 씻기거나, 천으로 문지를 때 등에 바늘 끝으로 찌르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태로부터 나옴에 기인한 괴로움이다.”(대림 스님 옮김)라고 나와 있다. 가엾어라! 얼마나 낯설고 괴로울까. 혼자 울고 있을 아이 생각에 남편과 나는 열 달간 몸과 마음을 실었던 임신호 기차에서 서둘러 내렸다.

아이를 만나다

응애~ 소리를 따라 가보니 하얀 배냇저고리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기가 있다. 남편이 배냇저고리를 살포시 젖혀 발목에 달린 이름표를 확인한다. “‘김서리 아기’라고 적혀있네. 세상에, 우리 아기다!”라며 남편이 아이를 안는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맞나요? 눈코입 다 제대로 붙어 있나요?” “걱정 마. 있을 거 다 있어”라며 남편이 내 품에 아이를 안겨준다. 너무 가벼워서 마치 여섯 살 꼬마 적에 처음으로 내 어깨에 앉았다가 간 노랑나비 같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작고 여린 이 아이에게 뭘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 그렇게 한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작은 입을 오물오물한다. 배가 고프구나! 아이에게 젖을 허겁지겁 물리며 깨달았다. ‘아, 아이를 먹여 살리는 일이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출산의 감동, 생명 탄생의 신비… 뭐 이런 멋있고도 감격스러운 순간들은 한가로운 여유와 함께 오지 않았다. 아이를 만나는 순간, 어느새 나와 남편은 부모의 자리에 와있었다. ‘부모’라는 건 고개를 들어 쳐다봤던 높은 하늘과 같았었는데 이 철없는 내가 하늘 같은 부모란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아이를 열 달간 품어서 낳았다고 지금의 나와 남편의 자리가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리와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부모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할까? 나는 부모의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가?

《앙굿따라 니까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함 경〉에는 부모의 은혜에 쉽게 보답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부모는 참으로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하나니, 자식들을 키워주고 먹여주고 이 세상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키우고 먹이는 것도 힘들지만 ‘이 세상을 가르쳐주는 것’은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 형편대로, 생긴 대로, 아는 만큼 아이에게 이 세상을 가르쳐주게 될 텐데, 그 세상이 세상의 참모습과 진리에 가까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아이에게 세상을 바르게 보여줄 수 있을까?

부모님을 떠올리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한 어깨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다른 한 어깨는 책임감으로 묵직하다. 문득 어머니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그려진다. 시간을 거슬러, 그들의 눈주름이 걷히고 구부정한 등이 펴지고 머리가 까매지고 이빨이 가지런해지더니 갓난아기인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이 보인다. 그 젊은 시절, 그들도 나처럼 풋내 나는 부모의 자리에 있었겠지. 누구나 때가 되면 늙는다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키우는 사람들은 마치 서둘러 늙으려는 듯 자신의 젊음을 짓이기며 산다. 남들 다 아는 걸 출산이라는 산을 넘고 나서야 알게 된 이 못난 딸이 지금이라도 부모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면 어찌 해야 할까?

《앙굿따라 니까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함 경〉은 이렇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신심이 없는 부모로 하여금 스스로 (삼보에) 신심을 가지게 하고, 신심에 머물게 하고, 확고하게 굳히도록 한다. 계를 파한 부모로 하여금 스스로 계를 가지게 하고, 계에 머물게 하고, 계를 확고하게 굳히도록 한다. 인색한 부모로 하여금 스스로 보시하게 하고, 보시하는 것에 머물게 하고, 보시하는 것을 확고하게 굳히도록 한다. 통찰지가 없는 부모로 하여금 스스로 통찰지를 가지게 하고, 통찰지에 머물게 하고, 통찰지를 확고하게 굳히도록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참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대림 스님 옮김)

부모님께 집과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모님 스스로 신심과 계, 보시행과 통찰지를 확고하게 굳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다! 내 고민이었던 ‘나는 어떻게 살아야 아이에게 세상을 바르게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이것이구나! 신심을 가지고 계를 새기고 보시행을 하며 통찰지를 얻도록 노력하는 삶, 이것이면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칠 힘이 생기겠고,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참된 삶을 살도록 도울 힘도 생기겠다. 딸아이를 바라보며 들었던 고민들이 부모님을 떠올리며 답을 찾게 되었다. ‘출산’은 이렇게 내 삶에 ‘부모와 자식 간’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냈고, 기존의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새로운 각도에서 하게끔 만들었다.

아이는 배가 부른지 새근새근 잠들었다. 자면서 쌩긋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며 배냇짓을 한다. 배꼽에서 채 떨어지지 않은 탯줄 끄트머리와 한 올도 아까운 배냇머리를 보며 아직 내게서 완전히 분리된 건 아니라고 믿는 건 엄마의 미련일까. 아이가 이 세상을 향유하며 훨훨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라면서도 열 달간 품었던 미련이 남아 품 깊숙이 아이를 안아본다.

.

잠든 아이를 안고 서서 기차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자리를 비웠던 남편이 보따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푼다. “자~ 이건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의 도토리묵 무침이고, 이건 딸기야. 이건 배추 말이 찜인데 처음 해본 거라 맛이 있으려나 모르겠어. 당신 기운 내야지. 방금 한 거니까 먹어봐.” 음식이 식을세라 급히 달려온 남편의 뺨에서 땀방울이 또로록 떨어진다. 그의 땀을 닦아주며 나는 동글동글 예쁘게도 말려있는 배추 말이 찜을 한 입 베어 문다. 돼지고기 비린 맛을 배추가 잘 잡아 참 담백하고 맛있다. 도토리묵은 무맛이면서도 떨떠름한 맛인데 갖은 양념으로 잘 무쳐져 입에 착착 붙는다. 이 음식들을 다 먹을 때까지 얌전하게 있던, 향도 아까운 딸기는 신맛도 있지만 단맛이 더 반가워 계속 먹게 된다.

이 음식들… 마치 우리 같다. “여보, 제가 가끔 못나게 굴어도 배추 같은 당신이 저를 잘 보듬어 주세요. 저는 밋밋한 당신 인생에 감칠맛 내는 양념이 될게요.” “고마워. 앞으로 아이 키우다 보면 힘든 일도 있겠지만 행복한 일들에 마음을 더 키워가자.” 남편의 말에 내 눈에서 눈물이 또로록 떨어진다.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남편이 아이를 바라보며 “우리 식구가 셋이 되었네. 이제 새 여행을 출발해볼까?”라며 활짝 웃는다.

우리는 앞으로 ‘시간’ 기차를 타고 ‘봄여름가을겨울’길을 따라 달리면서 ‘길흉화복’ 터널을 지나고 ‘희로애락’역을 거치게 되겠지. 신심과 계, 보시행과 통찰지를 연료로 삼고 서로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 많은 역과 터널을 지나가야겠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아이를 안고 다시 기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