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의 도덕적 무능을 말한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건축 기행의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가장 고귀한 건축이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말에 고개 끄덕였지만 아름다운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다. 3월, 푸른 댓잎처럼 싱그러운 현역 석강희(ATF건축사무소 대표) 건축가를 만났다.“동굴시대를 벗어난 인간은 더 높고 넓은 집을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콘크리트와 철이 개발되고 아치나 돔 같은 구조물 역시 공간에 대한 욕망이 만든 건축예술이죠. 건축은 인간 역사의 이해에서 비롯되듯이 철학을 기본으로 한 건축의 공학적, 예술적 감성이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반복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예술적 감성보다는 시대적 감성을 선택하고 여기에 지역적 특색을 접목한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저는 가족들과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림을 보면서 미술이 갖지 못한 건축의 공공성도 읽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해주는 사람이 처음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는 건축학과가 예술대학에 속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경부터 공대에서 건축대학으로 분리되어 학제가 바뀌는 중이지만 사회적 인식이 아직 부족하단다.
그는 지난해까지 3년여 영남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겸임교수로 후학들과 함께했다. 지방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패배 의식에 자신감을 심어주고 매사 부지런히 힘써야 함을 전해주고 싶었다. 선배들이 세계무대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그리고 건축 공부는 스스로 하는 만큼 실력이 늘어가는 거라고. 실제로 그의 수업을 들은 학생이 뉴욕 설계사무소에 합격했다는 기별은 가르치는 것의 고단함이 기쁨으로 변환되는 순간이었다.
시공 현장과 설계도면을 마주하는 고요한 시간과의 균형 감각은 어떻게 유지할까.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나왔다. 머릿속과 현장의 공간감을 비교·개선해나가는 작업이긴 해도 둘은 보완 관계라 균형이 깨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영화 <건축학개론〉 이후 건축가가 낭만적인 직업의 상징처럼 되었다. 하지만 건축주나 공무원과의 타협 지점도 필요하고 거친 현장과 수많은 건축 자재를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할 것 같다.
“한때 건축가가 설계한 집은 불편하더라도 작품이니 참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죠. 하지만 건축은 사람과 도시를 보살핌이 목적이므로 건축가의 작가성은 오히려 양보해야 할 부분입니다. 해서 건축주의 의견을 최대한 경청하고 수용하지요. 허가부서 공무원과는 적법한 설계가 원칙이고요. 해석에 따라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대화나 질의문답 같은 공식 절차가 있습니다. 자재 선택은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방법들을 시도해봅니다. 당연히 물성 간의 친화력이라는 원칙이 있고요.”
그는 행복한 삶을 사는 건축가가 행복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건축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그는 남매를 두었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며 설계한 건물이 완공되면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이 보람과 즐거움이란다.
자신의 일과 노동에 자긍심을 갖고 기쁨을 함께하는 열정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집이 거주의 공간을 상실한 채 그것이 지닌 부동산 가치에 집중하는 이 시대에 건축가로서의 지향점 혹은 삶의 방향은 어디에 두고 있을까?
“저는 건축가로의 삶을 차선으로 삼고자 했으나 이 분야를 전공하면서 최선으로 확고해진 경우입니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에 대한 꿈도 꾸었지만 독일에서 더 깊이 배우고 일하면서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5퍼센트의 특별한 건축을 통해 스타가 되는 건축가들이 있다면, 저는 나머지 95퍼센트의 일반인들을 위한 건축을 어떻게 하면 더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습니다.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제게는 더 특별한 그런 일반적인 분들과의 건축 담론이 제가 평생 공부해야 할 숙제입니다.”
건축가 석강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독일 건축사이다. 유학하는 동안 쌓은 정신적 사상의 토대가 자연스럽게 건축에서의 삶의 문제로 이어졌으리라. 귀국 후 설계와 시공을 맡은 첫 프로젝트가 대구 시내 서봉사의 북 카페와 후원(後院)의 재건축이었다. 서양에서 공부한 젊은 건축가와 사찰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
“어릴 적 서봉사 부근에 살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서봉사의 오랜 신도이시고요. 어린이 불교학교에서였던 것 같은데 서봉사 지하법당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었던 기억이 있어요. 시내에서 드물게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서봉사가 현대적 감각으로 시민들께 다가가고자 하는 주지스님의 바람으로 시작된 공사였습니다. 한옥 형식의 법당과 콘크리트 구조의 요사채, 허물어지기 직전의 조그만 주택은 설계 개념을 잡기조차 쉽지 않은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초기 단계 원칙으로 사찰의 중심인 법당보다 겸손한 형태의 건축, 과거에 지어졌지만 현재 사용성에 적합할 것, 도심 사찰이지만 자연 경관을 적극 활용한 사유 공간일 것으로 정했습니다. 4개월의 설계, 6개월의 공사 기간 동안 뜨거운 기억들로 가득한 현장이었는데요. 온몸으로 물을 막으며 견딘 장마, 여직원은 더위에 두 번이나 쓰러지고, 공사 기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찰의 크고 작은 행사로 전 직원이 현장에 살았습니다. 완공되어 회향하던 날, 애태우던 자식을 결혼시키면 이런 기분이 들겠지 싶었어요.”
건축물보다 사람들의 삶에 무게를 두었다고 말한 건축가 정기용은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고 건축은 근사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라 했다. 석강희 건축가가 진행한 대구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프로젝트’야말로 여기에 부합되는 일 아니었을까. 역사가 된 이야기지만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담은 위안부 역사관의 이름은 희망을 모아 꽃을 피움이란 ‘희움’이다.
“대구의 근대건축자산연구 용역팀 연구원으로 실태 조사하면서 인연이 자연스럽게 제게로 왔어요. 시민 모금으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라 더욱 의미 있었지요. 특히 공사 중에 발견한 적산가옥 지하 벙커는 ‘희움’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으나 설계를 변경해야 하는 난관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지만 저는 적자 공사였지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커츠상 수상 작가로 건축가들이 존경하는 건축가,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건축가 피터 줌터(Peter Zumthor)를 좋아한다는 젊은 건축가 석강희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화성의 경당을 설계한 피터 줌터의 정보를 검색하면서 그가 그려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법당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