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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환경연대의 재창립과 불교계의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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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편집실 2015년 12월 406호
반가운 소식 하나. 불교환경연대가 재창립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인터넷을 통해 불교환경연대를 살펴보니 창립 1주년을 맞아 후원의 밤을 열었다는 소식을 검색할 수 있었다. 2009년 10월이었으니 불교환경연대가 창립한 때는 1999년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며 수경 스님과 문규현신부를 비롯한 종교인들이 부안의 갯벌에서서울 광화문까지 3보1배로 정진했는데, 이운동에 불교환경연대가 있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해서는 북한산 국립공원을 지키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불교환경연대 활동과 관련된 소식은 뜸해졌고, 최근 몇년 사이엔 조직의 존재조차 잊혀졌다.
불교계 NGO 활동이 미약하다 못해 사회적 존재감이 없는 정도이다. 불교환경연대 재창립 소식이 반가운 것은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종교학자 윤승용 선생은 지난해 세월호사건과 관련한 한 인터뷰에서“이 시점에서 불교와 스님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스님들의 질문에 두 가지를 얘기했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이번 세월호 사건은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참사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을 어떻게든 줄이고,더불어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가 기본적인 문제다. 그렇다면 탐욕을 벗어나는 삶과 연기적인 삶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가 할 일이 많지 않겠나. 우선 우리가자기 자리에서만이라도 모범적인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두 번째는“때로는 현실에 대해서는 정말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이 현대종교다”라면 서 시민운동에의 참여를 제안했다.“사회와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면 시민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작지만 한 사람씩 사회 참여의 장을 만들어가고 또 불의
한 권력과 국가에 대해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좋은 권력, 좋은 국가 만들기에 정성을 모아야 한다.”
윤승용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민사회, 시민운동의 중요성은 많은 이들이 강조했던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를 보면 시민사회라고 할 만한 영역은 보이지 않는다. 굳이 통계자료를 들춰보지 않아도 경험적으로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는 불교의 시민사회 역할이 매우 미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 영역은 사회가 민주화되고,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고,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공적 영역으로서의 의미를 크게 지닌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책임에 기반한다.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는 제도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불가피하게불러오며, 극단적으로 흐를 경우 공동체의 해체를 결과하게 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는 정치적으로도 소외된다. 특히 보수기득권층이 강고한 가운데 이념 갈등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정당과 사회기구도 위축된다. 지금 한국사회가 그런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종교에 거는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종교 또한 보수기득층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후의 치열했던 이념투쟁, 그리고 권위 주의정권의 장기집권에 따른 이념적 편향이 한국종교가 보수화된 원인이다. 7,80년대 가톨릭과 개신교의 민주주의 쟁취 투쟁이 있었지만, 87년 이후 급격히 보수화되었
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합리적·중도적 보수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상해야 한다. 소위‘87년’에 이뤄진 절차적 민주주의는 한계에 부딪혔다. 보수다수결에 의한 절차적 민주주의로 굳어졌다. 시민사회도 보수적 색채로 물들어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사회는극소수일 뿐이다. 이를 두고 다수가 선택한
결과라는 반론이 제기되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다수에 의한 선택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다양한 가치와 지향을 담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지 못한다면, 이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소외의제도화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다수결의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며 경멸했다.
독일 나치정권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로들어섰다. 다수의 선택이었다. 다수결 민주주의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정치학자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의 문제점을“보수독점의 정당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 민주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사회적 결과는 계급간 불평등구조가 급격하게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무엇을 시민사회라고 부를지에 대해서도 개념 재정립이 시도되어야 한다. 최장집은 이에 대해 보수적 부문, 공론장 부문 등으로나누어서 보았다. 즉,“시민사회에는 시장중심의 사익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부문도 있고,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제안하는 하버마스(J. Habermas)적 의미에
서의 공론장의 역할을 하는 부문도 있다.”다음과 같은 지적은 불교계 시민사회 영역을 만들어가면서 참고할 만한 내용을 담고있다.“강력한 권위주의 국가, 그와 위계적으로 결착된 비정부적 제도와 조직들, 냉전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대해 갖는 억압구조 등은 시민사회의 다원성과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권력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공간과 공적영역을 창출한 것은 사적이익결사체나 제도들이 아니라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계가 만들어가야 할 시민사회 영역은 참여불교의 가르침에 기반하면서 사적이익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것을 모색하는, 그러면서 국가나 정치권력,종단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방향으로의 시민사회이다. 불교환경연대의 재창립이라는 작은 사건을 놓고 불교계 시민사회를 얘기하는 것은 침소봉대하는 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계 시민사회를 논의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며, 불교환경연대가 명칭까지 바꾸는 큰 결심을 한 만큼 유념해야 할 내용인것은 분명하다. 불교의 초기 신앙공동체를보면 공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개인화와 다수결 원리에 의해 잃어버릴 공동체적 가치를 옹호하는 유용한 지향이다. 불교계가 시민사회 영역을 만들어가면서 민주·공화의 가치를 확장시키기를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국사회에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