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조정 인물의 반이 이곳에 있다 12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행기에 나타난 해인사의 기록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5년 12월 406호
4.《유가야산기遊伽倻山記》옥소玉所 권섭權燮 1711
고운이 일찍이“미친 듯 내달려 산속 가득 울어대니,/ 지척간 말소리도 분간키 어렵구나./ 옳으니 그르니 시비소리 듣기 싫어/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쌌네”라는 시를 짓고 손수 물 가운데 평평한 바위에 썼지만 여울물이 사납고 새긴 것이 깊지 않아 이미 다 마멸되고, 다만‘광분고교狂芬故敎’넉 자만 분별할 수 있었는데, 우암선생이 계곡 북쪽 바위 사이에 다시 그 시를 모사해 새겨놓았다.
-
5.《유가야산기遊伽倻山記》옥소玉所 권섭權燮 1711
골짜기 밖의 흐르는 물 사이에 반석 하나가 있는데, 그 모퉁이에‘尹, 孫, 金, 具, 梁, 洪, 鄭’등 일곱 성이 나란히 새겨져 있지만 유람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일부러 그 이름마저 숨겨 뒤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케 한 것이다. 그 꼭대기의 평평한 곳에‘칠성대七星臺’라 새겼는데, 아마 일곱 사람의 성을 대의 표면에다 남기고 이로써 호를 삼아‘칠성七星’이라고 떠벌려 자랑한 게 아니겠는가?
-
6.《유가야기遊伽倻記》유척기 1712 - 정혜
有一老釋. 云自妙香來棲. 年今七十五. 神觀不衰. 談辯快爽. 若有道者. 其名定慧.
한 늙은 승려가‘묘향산妙香山에서 와서 산 지 올해 75년째’라고 하는데, 신이한 풍모는 쇠하지 않았고 말도 막힘이 없다.도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그 승려는 이름이 정혜定慧라고 했다.
-
7.《유가야기遊伽倻記》유척기 1712 - 대적광전 편액
寺之外門三. 曰紅霞. 次曰鳳凰. 次曰不二. 次鍾閣曰圓音. 內有正門.中創法堂. 扁以大寂光殿. 匪懈堂筆也.“절에는 외문이 세 개 있는데 홍하문紅霞門, 다음이 봉황문鳳凰門, 그 다음이 불이문不二門이다. 그 다음에는 종각인‘원음각圓音閣’이 있다. 안쪽으로 정문이 있고, 가운데 법당이 서 있다.‘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쓴 편액은 비해당匪懈堂 이용李熔(세종대왕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
이때가 1712년이니 해인사는 이후 정조 4년(1780)과 순조 17년(1817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등 세 차례 큰 화재가있었으며 안평대군이 쓴 편액은 이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삼촌으로 알려진 영운 스님의서체로 알려져 있다.(팔만대장경과 해인사 - 서수생)
-
8.《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최흥원 1757
西上一高臺. 卽所謂學士臺. 而孤雲手植松已枯. 獨其査在矣. 余以爲此行適値二月. 天又雨. 正合植松. 乃命奴採四小松. 植其傍. 後之登此臺者. 其必曰措大特學學士之爲. 未知諸僧果護養得長否.
서쪽으로 높은 대에 오르니 이른바 학사대學士臺이다. 고운이 손수 심은 소나무는 이미 말라버리고 다만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번 여행은 마침 이월 달이고, 비가 내려서 소나무 심기에 적당했다. 그래서 노비에게 명하여 네그루의 작은 소나무를 캐어 그 곁에 심으라고 했다. 뒷날 이 대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조대(措大 ; 청빈한 선비)가 특별히 최 학사가 한 것을 배웠구나”라고 할 것이다. 승려들이 과연 잘 보호하여 키울 것인지는 모르겠다.
-
9.《유가야록遊伽倻錄》하진태 1760
石面有尹節度得逵氏.及其從遊人李生孟賢題名. 此吾意中人.而乃遠別者也懷人之餘. 見名於此. 亦可幸也.굽어 물속을 보니 돌의 면에 절도사節度使 윤득규尹得逵와 그를 따르던 이맹현李孟賢의 이름이있었다. 이 사람은 내 마음속에 있던 사람으로 이별하여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사람을 그리워하던 차에 여기서 이름을 보니 또한 다행한 일이다.농산정 상류에 새겨져 있다.
-
10.《유가야기遊伽倻記》문정유(동천東泉) 1821 - 면광병부眠廣病夫 입음농자立窨聾者 천상산인泉上散人
1821년 문정유는 신사년 4월에 면섭眠燮, 입섭立燮과 함께 가야산 홍류동에 유람했다. 유람하면서《유가야기》를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홍류동 반석 위에 세 명의 이름을 팔분체로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골짜기에 가득한 제명題名들은 거의 한 편도 온전하게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니, 높은 것은 자획을 식별하기어렵고, 낮은 것은 사람에게 밟히거나 물에 침식되는 것을 면할 수가 없었다. 작게 새긴 것은 눌려진 것이 많아모두 이끼가 끼고 글자가 마모되었으니,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 드물었다. 대개 제명을 기록한 본래의뜻은 오래 전하려는 것인데, 끝내 마모되어 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제명을 남기려는 의도가 있겠는가?
지금 우리 세 사람 또한 여러 사람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입섭이‘민섭은 병든 사람이고, 입섭은 귀머거리라. 샘가에 이리저리 노니는 한가한 사람(眠廣病夫 立窨聾者 泉上散人)’이란 열두 글자를 팔분체八分體로누워 있는 돌 위에 썼다.”

면광병부眠廣病夫 면섭은 병든 사람이고
입음농자立窨聾者 입섭은 귀머거리라
천상산인泉上散人 샘가에 이리저리 노니는 한가한 사람 1821 문정유
홍류동 환선대 바위에는 네 글자로 된 3행시가 적혀 있다. 1행은 지워져 희미하고 나머지 두 행은 글자는 분명하나 글씨체가 독특하여 알 수가 없다.

문정유의《유가야기》를 인터넷에서 찾아 사진과 비교 검토하던 중 농산정 환선대에 새겨진 12글자의 석각문에 관련된 내용임을 알아냈다. 우연히 자료와 사진을 조합해 보니 문정유가 1821년에 새겼다는 3행시가 바로 이것이다.‘아! 이것이 조선시대 팔분체 글씨이구나’감탄하며 한참이나 앉아서 글자만 바라보았다.
‘민섭은 병든 사람이고, 입섭은 귀머거리라. 샘가에 이리저리 노니는 한가한 사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문화컨텐츠닷컴”에 올라와 있는 번역문이 오류가 있는 것 같아 바로잡아보려 한다.함께한 일행이 필자인 문정유(동천東泉)와 입섭, 면섭 형제들이다.“면섭은 병들은 사람, 입섭은 귀머거리, 동천(문정유 자신)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병들고 귀머거리고 정신 나간 사람으로 자신들을 낮춰 부르며 선비로서 이름 남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특유의 해학을 문장에 담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이말 그대로 병든 사람, 귀머거리는 아닐 것이다. 무슨 속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 팔분체의 글을 홍류동 바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