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게 물었습니다.예술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이런 주제는 오랜 논쟁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유승우 시인을 모른다. 그날전철을 기다리다 위의 시를 읽었고, 여러 번 읽었다. 수첩을 꺼내 옮겨 적었고, 다시 이 글의 첫 머리에 올려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저 시는 작자의 생각과는무관하게 나에게 다가와 나와 합쳐졌다.
내가 왜 그날 저 시 앞에 멈춰섰던 것일까? 어떤 사물을 보고는 자석에 이끌리듯 나도 모르게 멈춰선 경험이 언제였지? 그런 경험은 흔하지 않다. 지난 여름비 오는 날, 구름에 가려진 앞산의 모습을 더듬거리다가 빗물을 모아 동그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손바닥같은 단풍잎에 시선이 갔다. 그래, 비 오는 날엔 가까운 것을 보아야 해. 비오는 날, 비와 작은 단풍잎과 구름에 가려진 앞산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동안 세상의‘파도’를 보며 어떤 지혜로움으로이 ‘파도’를 넘어야 할지를 표현해 왔다.‘파도’는
있는 그대로의 ‘파도’로 보려 할 때 비로소 경험되어지는 입장에 따른‘파도’에 대한 다른 시각이 있음을 깨닫는다. 각자의 시각에서 보여 지는 모습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한, 자신이 바라본 모습이 자신의 시각에 의한 것임을 자각하지 않는 한 오직 자신의 시각이 옳다고 생각을 한다.‘파도’를 바라보는 고정된 단단한 시각은 참으로 무섭기까지 하다. 그것이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단체에서 행해지는 때에는 더욱 더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파도’를 타지 못하고 ‘파도’에 다치기 때문이다. 비현실이어야 할 것이 현실이 되는 경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나 자신도 치우친 시각으로‘파도’를 바라보고 판단할 여지가 없진 않지만‘파도’에 대한 시각은 그러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온전히‘파도’자체로 바라보게끔 자각시키려 나름 노력하며‘파도’를 바라보는 치우침에 대해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세상에서 전해지는 소식들은 무겁고 우울한 면들이 있다. 0.01%의 희망도 없다는 울분과 차가움이 뒤섞인 분위기가 전해질 때도 있다. 요즘과 같은 겨울의 초입에 들려오는 딱딱한 견해로 바라본‘파도’에 대한 판단은 참으로 춥게 느껴지게 하기도 했었다. 마음이 차가와졌었다. 나는 우리들의 마음이 차가와졌음을 글로서 표현했었다. 나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다시 따뜻해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말하였었다.
시간은 시간을 건너뛰지 않는다. 희망한다고 해서고통의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희망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방편과 어우러져서야 마침내 희망이 된다. 미당은‘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했다. 꽃이 피기 전 천둥과 먹구름, 무서리가내렸다. 주름진 누님의 얼굴은 국화꽃으로 피었고, 시인에겐 젊음의 뒤안길에 선 누님이 국화꽃으로 보였다. 세월에 채여도 주눅 들지 않았으므로 얻어진 보배보다 값진 깨달음 같은 것이다.
그날 저 시 앞에 멈춰 섰던 것도 치우친‘파도’에 대한 견해로 세상 전체에 벌어진 큰 영향 때문이었다.어떻게 이 비현실의 현실을 나아갈 것인가, 이런 질문에 눌려있었는데, 파도가 되라는 것이었다. 파도에게 왜 파도를 치느냐고 묻는다면, 파도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듯, 사람이므로 그저 생각하고 말하고 들으라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만난 사건은 인간의 의지라는조건이 결합되어 비로소 역사로 나아간다. 이 가르침을 새기게 되었으니 흰 눈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