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운 스님은 올해‘조계종 포교대상’의 대상을 수상했다. 그런 스님의 처소를 찾으니 그동안 받은 표창이 가득 놓여 있다. 대통령 표창과 국민훈장 동백장과 만해대상을 비롯해 성운 스님은 백여 개의 상을 받았다. 그런 스님 책상 위엔 타임지가 놓여 있다.
“시대에 맞게 부처님 법을 전하려면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파벳도 모른 채로 타임지를 보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것은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바로 직후였다. 스님은 불교가 세계적인 흐름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대학문을 수학하기 위해 걸망을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른스님들은 세속 공부를 만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불교가 한국 사회 중생들의 삶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검정고시부터 시작해 만학도가 되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타임지를 읽었어요. 그걸 읽으며 세계정세에 눈을 떴지요. 정치 경제 과학을 비롯한 세계 시사를 파악하고 불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했어요. 그리고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됐지요. 우리나라 성장 속도를 봤을 때 우리나라도 서양처럼 고령화 시대가 올 것이란 게 예감이 들었어요. 노인복지가 사회복지의 종점이 될 것이란 걸 타임지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죠. 나를 이룬 것이 부처님의 경전이라면 내게 세상을 알게 한 것은 타임지였어요.”
1978년 성운 스님은 북한산의 삼천사로 왔다. 당시 삼천사 주변은 상이군인과 철거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사는 가난한 동네였다. 우선 그들의 생계를 위해 쌀과 생필품을 보시하면서 불교복지의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불교사회복지에 대한 원력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1994년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7년엔 노인전문요양원인 호암마을을 개원하고 인덕재가노인복지센터를 운명하며 노인 복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1999년엔 서울시로부터 시립은평노인종합복지관을 수탁했고 2010년엔 인덕노인종합복지타운을 건립해 노인요양원 붓다마을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2015년엔 최우수 노인요양기관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30여 개의 시설에 종사자만 해도 600여 명이다. 그뿐 아니라 스님은 1975년부터 40여 년 동안 교도소를 다니며 재소자 교정교화 포교, 그리고 군부대에 법당을 건립하며 군복지 포교에도 기여해 왔다. 그런 중에
삼천사는 30여 개동의 가람 불사를 하며 마애여래입상을 고증하여 전통문화재사찰 기도도량을 이루었다.
성운 스님이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일타 스님께서는 수좌의 길을 권하셨다. 그러나 성운 스님은 이 시대에 수행자도 있어야겠지만 불교를 전달하는 시스템 없이는 불교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행과 포교를 겸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통찰지를 세상에 쓰려면 후득지를 체득해야 해요. 많은 체험을 통해서 방편지가 얻어지지요. 아무리 좋은 지식과 지혜를 갖고 있다고해도 그게 상황과 사람에 맞게 전달될 수 있는 방편지가 필요해요. 마치 은행에 돈이 있다고 해도 그게 시장에서 쓰이지 않으면 죽은 돈인것과 같죠. 수행자라면 아픈 곳에 가서 실천해야 합니다.”
성운 스님은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불교사회복지론을 최초로 개설해서 강의하고 있다. 이론과 현장의 경험을 접목시켜 불교사회복지학 분야에 새로운 길을 내어가고 있는 것이다.
“복지라는 게 인간이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곳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도와주는 것이잖아요.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는 게 바로 그것이죠. 불교는 복지고 복지는 곧 불교예요. 부처님은 대사회복지
사예요.”
성운 스님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긍정의 눈이라 말씀하신다. 복지는 보살행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실천하려면 긍정의 눈으로 접근해야 해요. 어려움이 있는 곳에 가서 도와줄 사람과 도와주지 말아야할 사람을 가를 수는 없어요. 분별 없이 지금 당장 도와줘야지요. 긍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창조됩니다.”
성운 스님에게 있어 복지 활동을 하는 모든 곳은 당신의 법당이고 수행도량이다. 그곳에서 만나는 모두가 선지식이다. 누군가는 왜 힘들게 그런 일을 하느냐고도 묻고 편하게 살라고도 권하지만 스님은 지금 이렇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나 하신다. 여행을 다닌다고 즐겁겠나, 이 일에서 손을 놓는다고 편하겠나 하신다.
“난 오로지 내 주어진 삶의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 뿐이에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멈출 수 없어요. 그러면 내 스스로가 날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이 길을 갈 수밖에요. 이런 수행을 하지 않고 뭘 하겠어요.”
성운 스님은 속리산 법주사에 동진출가했다. 그 후 대흥사 용주사 월정사 해인사 화엄사 신흥사 등에서 경학과 선수행으로 정진했다. 1960년 용주사에서 큰스님들을 모시고 살면서 경학을 배웠고, 기신론과 금강경의 대가가 있다고 하면 전국 어디든 탁발을 하며 찾아갔다. 그렇게 어느 곳에서든 3,4개월씩 머무르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전국의 기도 수행을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폐사라 해도 찾아가서 수행 정진했다. 환희심으로 가득했다.
“내가 그때 원을 세우기를, 백만 명에게 부처님 법을 전할 수 있는 법사가 되어야겠다 했어요. 그 힘으로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인덕원은 복지시설의 규모가 크다 보니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요양시설이니 병상에 누워있는 노인들은 버려졌다는 생각에, 자식들은 부모를 맡긴 불효자라는 생각에, 요양사들은 그 일을 해내야 하는 고달픈 심정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감정이 발로되는 곳이다. 휴일이면 하루에 면회객만 천 명이 넘는 곳이니 각자 자기 욕구들이 넘쳐난다. 그때마다 스님은 그 어떤 문제에도 시비하지 않는다. 가고자 하는 방향만 생각하면 그 무엇도 저항과 갈등이 되지 않는단다. 스님에게 있어선 그 어떤 문제도 무의미한 것이 돼버린단다.
“조건을 내려놓으면 어려움이 없어요. 오로지 해야 할 바를 실천할 뿐이지요. 부처님 법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에요. 일시적인 행복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려면 잣대를 내려놓으면 돼요. 그러면 세상이 둘로 보이지 않아요.”
이 시대의 사람들은 깨달음이 멀리에 있고 광대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결코 닿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자기 욕구만을 표출하며 얼굴에 구름이 잔뜩 낀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스님은 그들이 볼 수 있을 만큼의 빛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마주보아 주지 않는다면 불교가 성큼 다가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고 알려줘야지요. 나눔이 복지예요. 복지라는 바구니에 불교를 담아서 전달해야지요. 깨달음의 길을 일러주기 위한 방법은 복지뿐이에요. 난 그걸 확신해요. 나눔을 통해서 비우고 그럼으로써 무아를 증득하고 그럼으로써 무연자비를 행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성운 스님은 현재 은평구립도서관을 비롯해 다섯 개의 도서관을 운영 중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간이 공공도서관을 위탁받았다. 그러면서 교도소에 책 10만권 보내기 운동을 하기도 했다.
“책 속에 사람이 있고 길이 있고 삶이 있어요.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종합병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님은 사찰마다 도서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신다. 사찰이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쉼터가 되어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고민을 토로하고 상담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란다. 그렇게 살아 숨쉬는 불교가 중생들 한가운데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신다. 그래서 삼천사는 현재 공사 중이다. 천년 고찰을 누구라도 찾아와서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운 스님이 원력이기에. 그리고 스님에겐 원이 하나 더 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아요. 외국으로 팔려가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데려다가 우리가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인복지를 하고 있으니 이제 영아복지를 하고 싶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그게 내 원이에요.”
그런 성운 스님께 여쭙는다. 지금 서 있는 그곳이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는 당신이 나를 만나서 마음 에 실금이라도 간다면, 그걸로 좋지요.”
한겨울 꽝꽝 얼어붙었던 강물에 무심히 바윗돌이
떨어진다. 쩡 소리를 내며 우주가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