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개운사 아미타부처님께 봉안된 화엄경의 세계’와‘대곡사의 불화’전이 한창이다.매년 두 번의 특별전과 기획전을 여니 박물관장은 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자리다. 게다가 지난 8월에‘성보박물관협회’가 발족되면서 화범 스님은 초대 회장을 맡아 더욱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계종 산하의 불교박물관만 해도 35개 정도가 되는데 운영이 잘 안 되고 있어요. 성보박물관은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거기에 깃든 정신을 선양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건립이 되었지요. 그런데 소장 유물이 부족하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개관은 했지만 문이 닫혀 있는 박물관이 대부분이에요. 이번에 발족한 성보박물관협회는 이런 문제를 비롯한 여러 난제들을 해결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졌습니다. 불교 소양을 갖춘 전문 인력을 양성해서 성보를 제대로 보존 관리하고 불교문화를 발전시키는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교구본사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으로부터, 가정용이나 상업용 전기를 교육용으로 전환받기로 했다. 또한 박물관을 보수하거나 신축할 때 불교중앙박물관을통해서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화범 스님은 이러한 성과를 거둔 것이, 향후에 진행되는 문화재 사업에 있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성보박물관협회’를 탄생시킨 배경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성보는 문화재라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 신앙적 가치가 있는 거예요. 성물이기에 기도의 대상으로 성스럽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성보란 건, 옛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거든요.”화범 스님은 7세에 출가해 갑사 신흥암에 살았다.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고 불교가 폄하되던 시절이라, 성보들이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단다. 아이들이 장난감 삼아서 가지고 놀고 누구든 주워가면 임자이던 시절이었단다.
“난 문화재 속에서 살았어요. 그러면서 그것들이 없어지는 걸 봤지요. 요즘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우리 불교문화는 여러 분야에서 우수성이 인정되는데 후손들이 잘 지키지 못했어요. 서구 열강 세력들은 남의 나라 것도 가져다가 전시하는데 우린 거꾸로 도굴해서 외국에 팔아먹었으니. 문화재를 경제적 가치로만 보는 내부의 적이 문제인 거죠. 문화는 우리의 혼이고 정신이고 역사인데 그걸 팔아먹은 거예요. 이젠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는 수준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들도 당연히 성보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야지요. 스님들은 성보문화재속에 살고 있으니 전문가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 문화재는 우리나라 전체 문화재의 75%를 차지할 만큼 한국 문화재의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불교 문화재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이 나라의문화재를 지키지 못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화범 스님은‘성보박물관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불교 문화재가 종교적인 차원의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을 바로 세울 것이란다. 그렇게 했을 때, 정부 지도 계층의 역사의식도 바꾸어 나가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란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뿌리가 없는 민족이에요. 역사는 문화라는 토양에서세워져야 하기 때문에 문화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문화가 없으면 아무리 경제 성장을 하더라도 사상누각이라고 생각해요.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어떻게세우느냐가 한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핵심이고 근간입니다.”
화범 스님은 어려서 출가해 시대별로 다양한 불교의 모습들을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산중에 사니 학교에 다니지 못 하고 절집에서 훈고학적인 교육만 받으며 살았다. 7살 때부터 수마를 쫓는 회초리를 맞으며 기도를 하고 참선을 했다. 노스님이신 석봉 스님을 시봉하며 12살에 계를 받고 스님을 모시고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4살이 되던 해에 강당의 글 읽는 소리가 좋아서 부산 범어사에 가서 경을 봤다.그리고 또 양산 통도사에서 경을 봤다.
“참 어렵게 살았어요. 이불이니 책이니 바루니 다 싸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난 아무 것도 없었어요. 탁발해서 먹고 스님들이 관광객들한테 그림엽서 팔아서 책 사보던 때예요.”
화범 스님은 청정하고 소박했던 그 시절을 마음 깊이 두고 산다. 늘 자신을 낮추던 큰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학인들이 강당에서 공부할 때나 선방에서 수좌들이 참선할 때, 큰스님이 조용히 나가셔서 흰 고무신을 전부 닦아서 섬돌 위에 나란히 올려놓으셨어요. 당신 체력이 있을 때까지 직접 옷을 빨고 누덕누덕 기워 입으시고 양말도 어려 번 바느질해서 신으셨지요. 수행자는 치열하게 정진을 해야겠지만 정말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해요.”
그래서 화범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에 있는‘단요형고但療形枯 위성도업爲成道業’이란 말을 가슴에 두고 산다.음식을 받는 것은 다만 몸을 여위지 않게 하여 도업을 이루려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시에 있어시자施者 수자受者 시물施物, 삼륜이 청정해야 하는데 그중 수자로서의 청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늘 깨어 검소하고 부지런히 살며 수행과 전법에 충실해야지요. 수행자는 신심이 떨어지면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무슨 권력이나 명예가 필요하겠어요.”
화범 스님은 요즘 스님들이 경제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금처럼 사찰이 운영되면 물질이 진리를 대체하는 시대가 계속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권력을 누리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고 돈을 얻기위해 거래를 하고 읍소를 하고 굴복하는 모습은 수행자의 모습이 아닐 것이니 의식 자체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하신다.
“무소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사찰은 소유하되 스님은 무소유여야 하지 않을까요. 사찰은 수행 공간을 유지하고 수행자를 애호할 수 있도록 소유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안에서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소유하지 않아야지요. 무소유까지는 안 가더라도 한 배를 탔다는 인식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세속인들도 하지 않는 정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단 말이에요. 종단의 현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범 스님은 뒷방 생활만 30년을 했다. 그러고는 제도권에서 10년을 살았다. 종회의원도 하고 종회 사무처장도 하고 환경위원회 위원장과 법규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광동학원 이사장도 하며 여러 걸음을 거쳐 현재 박물관장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스님은 그런 이력 끝에 이런 말씀을 하신다.
“뚜렷한 결과가 없는 인생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좋아요.”
스님은 지금이 행복하단다. 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어떤 분야에서 출세하는 것보다도 지금 스님으로 살고 있는 게 너무나도 행복하단다.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해도 참 행복하게 생각해요. 다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시주밥을 먹으며 살았는데, 포교나 수행을 치열하게 하지 못했다는 뉘우침이 있지요. 남은 생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율장이나 윤리의 잣대를 갖다 대는 건 싫고 본능이 작동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화범 스님이 말하는 자유란 무얼까 가만가만 생각해보는데, 스님이 말씀하신다.
“낙산사에서 7년 동안 바다만 보고 살았던 적이 있어요. 하루 종일 파도만 보고 있어도 그게 그렇게 행복했어요.”
끝없이 밀려오고 부서지는 그 파도의 너울, 전생에도 스님이었을 것만 같다는 화범 스님은 그 너울 안에 계신 걸까. 거기 눈을 감고 몸을 맡겨 그토록 자유로워 그토록 행복하신 걸까.
“잎이 피고 무성해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계곡에 물이 흐르고 안개가 산허리에 걸쳐 있다 사라지고…. 난 그걸 보면서 기쁨을 느껴요.”
화범 스님은 북한산 용덕사의 회주로 계시다. 스님은 늘 걸어서 절까지 올라가신단다. 그러고는 법당 앞 마애불 앞에 앉아 있자면 1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개 온달이가 옆에 와서 앉는단다. 그러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단다. 그게 그렇게도 행복하단다. 행복과 자유가 따로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