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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인물의 반이 이곳에 있다 10 - 바위에 기록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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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5년 10월 404호
1. 홍석모洪錫謨 1781년(정조 5)∼1857년(철종 8)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구화재九華齋·도애陶厓 ·옥탄거사玉灘居士.
1819년 39세에 과천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1820년 40세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하였다. 59세 되던 1839(헌종5)년 4월 3일 강릉령康陵令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국사菊社라는 시사를 주도하였다. 1857(철종9)년 10월 15일 부인이 죽고 나흘 뒤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많은 여행을 하였다. 평양, 강화도, 개성,남한강, 황해도, 함경도, 금강산, 황간, 김천, 금강, 가야산 해인사, 관동과 관서, 연경사행, 남원 등이며 늙어서도 쉬지 않고 근거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이 경험한 국토자연을 시로 형상화하였는데, 명승 고적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시로 남겼다.
그는 11세부터 우리 전통의 민속과 연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전 생애에 걸쳐 꾸준하게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란 산문 저술로 남겨졌으며, 7언 절구 126수의《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로 집대성 되었다.

2. 정항령鄭恒齡 을축추래乙丑秋來
아버지는 실학자 상기尙驥이며, 어머니는 함경도도사 이만휴李萬休의 딸이다.
1743(영조19)년 교관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거쳐, 1747년 검열·지평을 지냈다. 지리학에 밝은 실학자로, 특히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한 지도인“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하였는데, 1757년 왕이 이를 보고“평생에 처음으로 백리의 땅을 지척에서 본다.”라고 할 정도로 그 면밀하고 상세함에 감탄하여 홍문관에 1부를 모사模寫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홍류동 환선대와 취적봉에 새겨져 있다.

3. 유광익柳光翼 이이장李彛章 이은李溵 서명선徐命善
비슷한 시기 정조를 도와 왕조를 세운 인물들이 나라히 새겨져 있다.

유광익柳光翼 1713(숙종 39)∼1780(정조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1760년(영조 3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으며, 1764년 서부도사西部都事로 임명된 뒤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와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767년에는 예빈시주부를 거쳐 고산현감이 되었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에 익위사에 있으면서 동궁을 모신 바 있다.
정통성리학에 몰두하였으며,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체계화하였다.

이이장李彛章 1708(숙종 34)∼1764(영조 40)
1739년 전라도암행어사를 거쳐 그 해에 부교리가 되었다. 1748년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749년 부승지에 오르고, 그 뒤 외직인 장단부사와 동래부사를 역임한 뒤 1762년 도승지가 되었다. 그 해 5월 영조가 세자를 휘령전徽寧殿에 불러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려 하자, 한낱 여인의 계시를 믿고 세자를 죽이려 하느냐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서명선徐命善 1728(영조 4)∼1791(정조 15)
1757년~1762년 합천군수를 지냈다. 1775(영조)년 일시 한직에 밀려났으나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洪麟漢 일파를 탄핵, 세손의 대리청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크게 노력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세손에 의해 발탁되어 예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5. 이은李溵 1722~1781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徐命善을 도운 공이 있다.

6. 장석윤張錫胤 1764년(영조 40)∼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백영伯永이다.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8(정조22)년 성주星州의 노장곡면蘆長谷面 10리를 현훙으로 옮겨 그 소출을 사용하게 해줄 것과 조창과 왜관 두 곳에 하납下納하는 일을 시정해 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1802(순조2)년 외직으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을 감찰하고 불합리한 실정을 고쳐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홍류동 계곡 석각에 최치원 둔세시를 차운한 시와 오언절구 시 두 편이 새겨져 있다.

7. 최송설당崔松雪堂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松雪堂은 호이다.
1886년(고종 23)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을 희사할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재산 30만2100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 불교에 귀의하여 당시 모든 재산을 해인사에 기증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해인사는 친일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기증을 포기하고 송설학원을 세웠다.
그의 이름이 룸비니 동산 우측능선에 새겨져 있으며 김천 청암사와금강산, 북한산에도 새겨져 있어 전국 명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8. 이범진李範晉
훈련대장 경하景夏의 아들이다.
1879(고종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민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되었으나 민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완용李完用 등의 박해를 받아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
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으며, 또한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계동학교啓東學校·세동학교世東學校·신동학교新東學校를 통합한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할 때에 1,000루블의 거액을 지원하였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9. 이건하李乾夏
1866년 김제군수 재직 때의 선정으로 국새國璽를 찍은 유서諭書와 함께 관복을 하사받았다.
1899년 내부대신으로 재임명된 뒤, 울릉도 개척을 위해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해 호구와 토지의 개간 정도를 조사하고, 주민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1904년 일본정부가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 개척권을
50년간 양도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박기양朴箕陽·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해 반대상소를 올리고 한편 규탄선언서를 발표해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확보를 저지하였다.
1905년 홍문관학사를 거쳐 충청남도관찰사를 지내며, 훈이등팔괘장勳二等八卦章을 받았고 중추원부의장·중추원찬의를 맡았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을 지냈다. 국권강탈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0. 이범팔李範八
이건하의 아들로 1895년(고종 32) 왕태자궁 좌시종관과 산릉 위원으로 근무하였다. 1899년(광무 3)경릉령을 지내고, 1902년(광무 6) 비서원승 등을 역임하였다.
1913년 11월 남작이었던 부친이 사망하자‘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사자(嗣子: 대代를 잇는 아들)로
서 작위를 습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