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인간의 유전자에 이익과 경쟁이 새겨져 있기에 자연스런 제도라는 점을 강조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최후의 제도라고 부르짖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욕망을 향해 전쟁 같은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견이다. 인류의 역사를 경제사적으로 보면, 원시공동체로부터 봉건주의, 자본주의를 거쳐 왔듯이 제도는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200여 년 전부터 인류를 거의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조차 변해왔고 변하고 있다. 물리학을 들먹일 것도 없이 경사면에 놓인 물체는 기울기가 커지면 떨어진다. 물체와 경사면의 접착성이 크냐 작으냐의 차이일 뿐이지, 기울기가 크면 물체는 낙하하기 마련이다. 물리의 법칙처럼 사회적 산물인 경제제도도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체제도 마찬가지다. 최선의 제도란 본디 없다.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주체는 구성원들이다. 21세기에도 입헌군주제가 정치제체로 작동하는 나라가 여럿 있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체제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실질적인 입헌군주제의 대표적인 나라로 브루나이를 꼽을 수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말레이시아 아래에 있다.
인구는 대략 40만 명(2010년 7월). 19~20세기 중 영국의 보호령, 일본이 점령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무장봉기를 통해 1984년 1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브루나이는 인간 개발 지수가 동남아시아에서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국가이며,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브루나이는 국제통화기금이 선정한 구매력 평가기준 1인당 GDP가 5만 달러 정도로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국가이다.[www.freemapviewer.com/ko/map/지도-브루나이_830.html] GDP가 높은 것은 석유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겨지는 언론자유지수는 122위다. 아프리카의 남수단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엄청난 오일 머니를 이용해 적극적인 복지, 취업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세금이 없으며, 오히려 한달에 한번씩 전 국민에게 일정 액수의 용돈 금액이 지급된다. 그런데도 국민의 국왕에 대한 충성도는 높다. 왕정일치의 이슬람국가의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이 나라에 대고 민주주의 척도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할까? 어느 나라이든지 그곳의 제도는 그 나라 특유의 역사적 산물이다. 브루나이와 미국을 비교하면 어느 나라의 국민들이 더 행복할까? 척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문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반도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것 아니냐는 암울함을 경험했다. 남북의 무력이 집중해 있는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목함지뢰가 터져 우리 측 부사관 2명이 다리를 절단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에 맞서 남측은 전방 곳곳에 대북방송 시설이 들어섰고, 북측은 방송시설을 향해 포를 쐈다. 대응 포격이 이어졌다. 북측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남측은 미공군과 무력시위 비행으로 맞섰다. 다행이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이 대표로 나선 2+2 회담이 열려 무력충돌을 막았다. 지뢰 사건으로부터 남북 협상 끝에 합의문이 나오기까지 20여 일은 긴장의 날들이었다. 북의 벼랑 끝 전술과 남의 강경 대응이 부딪히면 필경 전쟁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한반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1953년 정전 이후 군사적 긴장은 높낮이를 견뎌왔다. 그런 탓에 시민들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했다. 전쟁이 터져도 어쩔 수 없는, 전쟁의 구체성을 외면하고픈 도피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남북 양측이 적정한 선에서 사태를 봉합해온 경험에 비춰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허탈한 낙관이 평온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 평온함은 비정상적이다.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어찌 평온할 수 있는가. 비정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끔찍한 일이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가 나타내는 결과는 고용의 불안이다. 비정규직이 통계에 따라 600~800만 명이다. 여기에 가족을 보태면 인구의 절반 가까운 이들이 고용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조합 설립율 10%인데도 노동자들의 권리는 온전하지 않다. 노조 설립율이 낮으니 기존의 노조는 강성을 띨 수밖에 없다. 정부는 보험설계사와 학습지교사를 개인사업자로 분류하는데, 이는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단결권을 애초부터 봉쇄한다.
다시 묻는다. 종교는 어떻게 중생의 삶에 기여할 것인가? 한국불교는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 신자유주의에 내몰린 삶, 분단과 전쟁의 공포가 일상화된 삶이다. 혹시 종교는 고통을 살피고 보듬기보다는 고통을 생산해내는 체제의 옹호자는 아닌가?
종정 진제스님은 지난 5울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사바에 서광이 처음 깃든 오늘은 부처님께서 강탄하신 날입니다. 이는 참으로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니, 나를 위해 등을 밝히는 이는 어둠에 갇히고 남을 위해 등을 밝히는 이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등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반도통일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등을 밝히고 모든 이웃의 아픔을 같이하는 등을 밝히고 모든 유주무주 영령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등을 밝혀 다 같이 부처님 오시는 길을 아름다운 등으로 장엄합시다“고 당부했다.
종단이 통일과 평화, 이웃의 아픔을 같이 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노동위원회, 환경위원회 등의 기구를 통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흡하다. 통일불교선언문을 초안하며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 노동위원회는 상근활동가 1명이다. 환경위원회는 국립공원 곳곳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호텔 등의 시설을 설치하고 있다는 데도 늑장이다. 전면적이어야 한다. 그래기 위해서는 신뢰 위에 종단이 서있어야 한다. 돈으로 선거를 치러 당선된다면 중생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는 애초부터 진정성을 의심 받는다. 범계 행위가 횡행해도 종법을 작동시키지 않는다면 한통속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그래서 종단 바로세우기는 불교의 본래면목을 세우는 기초이다. 지금 기초의 앙상한 몰골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