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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봉갑사 주지 각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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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취재·정리 | 정 영 2015년 09월 403호
주암호에 여름빛이 가득 배었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돌 때마다 산돌림 지나니 초록은 더 짙어지고 호수는 그보다 더 짙어진다. 그 진한 여름에 몸 들이니 마음까지 청쾌하다. 여름이어도 그것이 짱짱하리만치 순수하면 이토록 시원할 수 있구나 싶다. 인적 없이 맑은 그 고요의 길을 한참 지나자 천봉산 기슭에 깃든 봉갑사가 보인다. 널찍한 터 곳곳에 전각들이 보이고 거대 불상들도 보이는데 한쪽에선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마침 트럭이 한 대 내려오더니 멈춰 선다.
객이 오는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절에 머무는 보살님들이 환히 인사를 건넨다. 손수 트럭을 몰고 도량 곳곳을 오가며 일하는 중이었다. 송광사에서 포교국장 소임을 보는 각안 스님이 일을 마치고그제야 차를 몰고 도량으로 들어오신다. 그러자 동자승들이 나와 인사를 드린다.
그러고는 모두 제 자리로 흩어진다. 스님께서 내어주시는 차 한잔 마시려니 물으신다.
“봉갑사 도량이 어떻습니까?”
오랜 시간에 걸쳐 대불사를 하고 계시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아직은 휑한 이곳에 어떤 마음이 실려 있기에 처음부터 절의 인상을 물으시는 걸까.
“이 절엔 30명이 넘는 대중이 살아요. 2004년도에 와서 불사를 시작했는데 이게 모두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거예요. 산을 깎아내고 터를 다지는 일부터 우리가 다 했어요.”각안 스님은 2004년도에 해인사 원당암 소임을놓고 송광사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그곳에서 살다가 봉갑사 터에 와서 원력을 세우고 불사를 시작했다. 지금의봉갑사 자리엔 법당과 요사채뿐이었는데, 그것은 각안 스님 세속의 아버지께서 머물고 계신 곳이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어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아버지가 절에 스님으로 계시다는 걸 알았지요. 지금 89세이신 어른스님 모시고 삽니다.”어른스님이 무위사 주지로 계실 땐 그곳에 살며 고등학교에다녔다. 그때 염불도 외고 웬만한 절 생활은 다 익혔다. 어른스님은 누구에게든 어린 각안 스님을 소개할 때 막내아들이라고 숨김없이 말씀하셨다. 각안 스님은 어린 마음에도 그게 참 좋았다. 수행자로서 반듯한 어른스님의 모습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출가했다.
“세속의 인연이지만 불가에서도 큰 인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출가를 결심하고서는 해인사로 갔어요. 거기에가니 더 큰스님이 계셨어요.”각안 스님은 해인사 원당암에서 혜암 스님을 시봉했다. 입적하시는 날까지 18년동안 항시 곁에 머물며 모셨다. 일종식과 장좌불와의 참선수행을 하시는 큰스님을 모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
을 터. 언제 부를지 몰라 늘 옷도 입고 양말도 신은 채 잠들어야 했단다.
“도를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수행자의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살았지요. 그런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게 내겐 자부심이에요. 내 근기가 참선에 수승하진 않지만 그런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각안 스님은 4년간 큰스님을 모시다가 봉암사 선방에 가서 1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인사를 하러 잠시 들렀는데 큰스님께선 들어와서 집 좀 지어라 하셨다.
“참선만이 전부이신 어른이 저더러 집을 지으라고 하셨어요. 내 근기를 아셨던 거죠.”각안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원당암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스님이 해인사에 살면서 승복을 입고 지낸 적은 거의 없다. 늘 작업복 차림에 마스크를 쓰고 도량을 오갔다. 그때 붙은 별명이‘노가다 십장’이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도반들이나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일 그만하고 공부하러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다. 그러나 각안 스님은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켰고 그렇게 일해서 열여섯 채가 넘는 집을 지었다.
“참선수행을 통해서만 세상 이치를 아는 건 아니잖아요. 큰스님께선 집 짓는 일 속에서 제게 가르침을 주셨어요.”그 안에는 엄청난 공부가 있더란다. 집을 한 채 한 채 지을수록 알게 되더란다. 몸으로 체득하게 되더란다.“집은 우리 인생과도 같아요.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설계부터 작해서 기둥을 세우고 미장을 하고 도배를 하는 일까지 그야말로 종합 작품이에요. 그러니 우리 살아가는 일처럼 화합이 중요하지요. 어느 하나가 잘못되면 모든 게 다 흐트러지는 거예요.”그 안에는 함정도 많더란다. 그런데 함정이 많으니 더 큰 공부가 되더란다.“집을 짓다보면 큰돈을 만져야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해요. 규적인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니 많은 유혹들이 따라붙지요. 그걸 뛰어넘으려면 공부가 되어야 해요.”
각안 스님은 큰스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원칙을 배웠다. 큰스님은 대중 속에서 평생을 사셨지만 작은 모임 하나 없으셨단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아닌 것은 단박에 끊는 분이셨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각안 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렇게 스님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러나 말들도 많았다. 크게 일을 벌이는 각안 스님을 보며 다른 스님들이 왈가왈부하였으니 그 또한 깊은 함정이었다.
“그때 우리 스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네가 앞으로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으면 대중을 따라라. 그러나 네생각에 확신이 들 땐 누가 뭐라고 해도 밀어붙여라’그러면서 대중들 앞에서는 늘‘각안이 저거 멍청하다’하셨어요. 저를 믿어주면서 감싸주셨던 거죠.”
사람들은 각안 스님에게 왜 은사스님 밑에서만 사느냐고 했다. 수행자가 왜 종처럼 사느냐고도 했다. 하지만각안 스님은 큰스님을 언제나 믿었다.
“누가 종이 되려고 출가했겠어요. 난 우리 스님 밑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그 삶에는 내 공부가 있었어
요. 그건 결코 글귀 몇 마디 외어서 얻어지는 공부가 아니에요.” 혜암 스님이 입적하신 후 각안 스님은 2년 더
원당암에 머물며 불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어느 날 단박에 소임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청춘을 다 바친
원당암에서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나왔다.
“원당암을 가지려고 욕심을 냈다면 지금 내 것이 아니겠지만 그때 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내 것이에요. 목수는 집을 지어놓고 뒤로 물러서서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그 값어치가 사는 것이지요.”
수행자가 집을 지을 때 보아야 할 것은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그 안의 공부일 것이다. 그 안의 자신일 것이다. 그렇기에 각안 스님은 홀연히 돌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저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정말 잘 살아야 한“내가 이곳에 와서 봉갑사 불사를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말들이 들려와요. 내가 돈이 많아서 엄청나게 큰 도량을 만든다는 거죠. 그럼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어요.
그런 말 때문에 이 이 일을 멈춰야 하는가, 내가 생각한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는가입니다.”각안 스님은 가진 돈을 털어 중고 포크레인 두 대를 샀다.
그러고는 원당암에서 나올 때 함께 나온 보살들 사제들 상좌들 동자스님들과 함께 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손수 포크레인을 운전하고 돌을 나르고 흙벽을 바르고 기와를 쌓았다. 하루아침에 그냥 이뤄진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하나 하나 쌓아온 것이다. 각안 스님이 봉갑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다. 영광의 불갑사, 보성의 봉갑사, 영암의 도갑사 순으로 창건된 호남의 삼갑사는
백두산에서 발원해 지리산으로 흘러내려온 백두대간의 혈맥이 제주도로 이어지게 하는 삼각축에 위치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불갑사와 도갑사는 존재하나 봉갑사는 그 터만 남아 있어 이것을1600년 만에 각안 스님이 복원하려는 것이다.
“봉갑사가 지어지면 우리나라 운명이 바뀔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는 모래 위에 성을 쌓은 형국입니다. 기초
가 없는 거죠. 봉갑사 불사가 끝나는 날 우리나라가 통일될 것입니다.”각안 스님은 봉갑사 불사는 원당암에
서 집을 지어봤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은혜라고 생각한단다. 원당암에서 살았던 인연
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단다.
“난 우리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어요. 지금도 우리 스님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안내
를 해주고 계시죠.”각안 스님은 두 어른스님을 모시고 사는 게 수승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 엄
청난 공부가 있으니 이만한 복이 없다고 생각한다. 각안 스님은 항시 차에서 혜암 스님의 법문 녹음테이프를 듣
는다. 세월이 흘러 듣고 있자니 그때 몰랐던 스님의 깊은 말씀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단다.
“큰스님은 살아생전에 제 개인 교수셨어요. 그 어른의 제자로서 잘 살아야지요. 내가 우리 스님과 맺은 인연은 스님 입적하실 때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죽는 날까지 우리 스님을 시봉하는 거죠.”봉갑사에 혜암 스님의 가풍을 고스란히 옮겨놓고 싶다는 각안 스님은 혜암 스님의 진영을 모신 법당에 앉아 멀리 봉황의 날개가 펼쳐진 산세를 내려다보신다. 그러더니 말씀하신다.“오늘도 우리 스님이 여기 앉아서‘각안이 이놈!’하시는 것만 같아요.”그립고 그리운 이름들이 있다. 그 이름을 되뇌면 옆에 와 있는 것만 같아 그리움도 견딜 만해질 때가 있
다. 각안 스님은 길을 헤맬 때마다 늘 곁에 계신 혜암 스님께 길을 묻고 또 물을 것이다. 그러면 큰스님은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