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짐을 싼다. 귀국한 지 만 4년 반밖에 안 되었는데 이사는 벌써 네 번째다. 이사를 하게 되면 짐은 싸고 있는데도, 마음은 자꾸 풀어헤쳐진다. 구석구석 박혀 있는 옛 물건들 때문이다.
‘언젠가는 읽겠지’하면서 사 모은 책들,‘언젠가는 쓰겠지’하면서 사 모은 필기구와 엽서들,‘언젠가는
입겠지’하면서 사 모은 옷가지들. 그‘언젠가’가 언젠가는 오리라 믿고 인도에서 태국으로, 태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도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알뜰히도 이고 지고 다녔었던 거다.‘이번에는 어쩐다?’
그런 갈등을 하면서 장롱 깊숙이 참하게 앉아 있는 박스를 발견했다. 조심스레 박스를 열어보니 우르르 쏟아진다. 추억이 쏟아져 나왔다. 오래된 지갑, 옛 여권, 지인들로부터 받은 단주들과 엽서……. 그 많은 것들 사이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래 전에 쓰던 휴대폰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켰다…
방전되어 켜지지 않는다… 충전기를 찾아 충전을 한다. 그 충전되는 시간은 마치 잊고 지낸 추억의 단상들이 재정리되는 시간 같았다. 이윽고 충전이 되어 전원버튼을 눌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오래된 휴대폰 속에서 오래 전 문자들과 사진들이 펼쳐졌다. 그런 것들은‘그땐 그랬었지…’라며, 그것이 과거 한때의 애정이든 미움이든 집착이든 간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내 호흡을 붙든 것이 있었다. 그건 휴대폰 속‘메모’였다. 생각의 단상들을 때때마다 기록해두던 곳. 생각이 전개되어 매듭지어진 것들은 항상 지우던 습관이 있었기에 남겨진 메모가 많다는 건 매듭지어지지 않은 생각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는 의미였다. 종교적인 내용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내용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떠오른 발상들이 그 메모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내 호흡을 붙든 건,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도 그 발상에서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언젠가는 진전되어 펼쳐지겠지’하면서 끼적거리기만 했던 그 생각의 단상들, 그리고‘언젠가’를 기다리며모아둔 많은 물건들. 나는 그것들을 내 삶에 기분 좋게 들여와서‘얽매임’이라는 물과 볕을 주고 있었다. 버려야 할 책이 아니고, 버려야 할 발상들이 아니었다. 읽어야 할 책이며 풀어내야 할 발상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얽매여 있다. 버리지도 지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히 활용도 하지 않으면서 이고 지고 다니기만 했기 때문이다. 얽매임과 자유로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법구경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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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taddhino visokassa vippamuttassa sabbadhi
가땃디노 위소깟싸 윕빠뭇땃싸 쌉바디
sabbaganthappahnassa pariho na vijjati①.
쌉바간탑빠히낫싸 빠릴라호 나 윗자띠
[인생의] 여행을 끝내고 슬픔도 없고 모든 점에서 자유로우며
모든 얽매임을 끊은 이에게 고뇌는 존재하지 않는다②《. 법구경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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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법구경 제7장‘아라한(arahanta)’편에 나오는 시이다. 모든 점에서 자유로우며 모든 얽매임을 끊었다는 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책들을 버렸다면 내가 자유로워졌을까. 그 메모들을 지웠다면 내가 얽매이지 않았을까. 아니다. 버리는 것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것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얽매임을 끊는다는 건 온전히 그 얽매임의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나는 얽매여 있다. 이 얽매여 있음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적극적으로 풀어나갈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그 책들을 챙긴다. 그 생각의 단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휴대폰도 챙긴다. 또다시 이것들을 챙겨짐을 싸서 새로운 집에 이고 지고 가려한다. 이 생의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언젠가는’이라는 상표의 어떤 짐도 남아 있지 않고 온전히 자유로워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