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해 전이었다. 가을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붉고 노오란 색이 시선마다 가 닿았다. 해인사의 짙은 가을이 귓가에도 들려왔다.“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데…”이른 아침 공양 드시고 처소로 돌아오셨을, 어느 노스님의 고즈넉한 시간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노래 한 소절에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비질 소리까지 들린다.“삭삭삭”비질의 고운 결이 흙 위에 그려졌다. 보고 있으니 비질한 이의 마음결을 닮아가는 것 같아 푸근했다. 그렇다 그 해, 해인사의 가을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가을에 젖어 들다보니 어느덧 다가온 겨울의 초입에서 멋지게 함박눈도 내렸다. 그렇게 옅어질 줄 몰랐던 긴 겨울에도 시냇가의 단단한 얼음장에 봄이 스며들었다. 이내 금세 따가워진 햇볕을 마주하며 가야산도 여름으로 흘러갔다.
어느새 두번의 여름을 맞았다. 노스님의 여유로웠던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지만 해인사의 크고 작은 불사와 행사들은 변함이 없다. 사월은 정대불사, 오월에는 부처님오신날, 가을에는 보살계수계법회, 겨울에는 김장 울력이 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등이 달렸다가 말끔하게 정돈되고, 겨울 김장 울력에는 일명 배추풀장도 뚝딱 만들어지고. 누군가의 손을거쳐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한 일들이 해인사를 생동하게 했다.
일이 흘러간다는 것은 결코 녹록한 여정이 아니다.
묵묵히 견뎌내어야 하는 시간이다. 내 안의 무언가를 녹여내어야만 톱니바퀴처럼 그렇게 함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 이십여 년, 삼십여 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 해인사에 있었다.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했던 이유를 한 단어로 정의하긴 쉽지 않았다. 자부심이나 책임감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이들의 삶이 해인사에 녹아든 것일까. 점점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더불어 해인사의 근현대사도 그들의 추억 속에서 끄집어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인선우는 시작되었다.
해인사의 흑백사진 같은 추억담들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기억에서 꺼낸 조각퍼즐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해인사란 톱니바퀴와 잘 맞물려 흘러가는 듯 보였다.
종무소, 장경판전, 불연각, 종합접수처, 기와불사접수처, 포교국, 대장경연구원, 원주실, 홍보관, 매표소,영선부, 수련동문회, 사하촌寺下村, 월간해인까지.
그 곳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게 일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이 해인사에 있었다. 곳곳에 등을 다는 기분으로 이들을 비추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꿈틀댔고 해인선우도 제법 영글어갔다.
해인사는 일주문에서 장경판전까지 켜켜이 돌계단이 놓여 있다. 아찔할 정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말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엔 딴 생각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음공부라는 것이다. 헌데 봉황문을 오르는 계단 중에는 발을내딛기에 좁은 돌계단이 있다. 게다가 한 부분의 돌의면은 반질반질했다.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가닿았을 그러한 감상은 놓아두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자칫 쓰라린 고통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둔갑되었다. 사람들이 이 부분을 헛딛게 되면 미끌어질 수있는 것이다. 기분 좋게 해인사에 왔다가 쓰라린 추억담을 안고 가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서도 보고 넘기는사람들이 다반사였던지 근자에도 그 쓰린 소식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런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을 뒤집어, 직언을 곧잘 하던 어느 사람에 의해 그 반질반질했던 돌계단이 정을 맞고 말았다.“탕탕탕!”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누군가가 겪을 뻔했던 해인사에서의 아픈 추억은 한동안 없을 것 같다. 어느 선한 마음이 움직인 덕분에 말이다.
내 발아래의 디딤돌을 잘 살펴본 적이 있는가 내 아무리 씩씩하게 걸어간다고 해도 내딛을 디딤
돌이 없으면 우두커니 매여 있을 수밖에. 그 흐름은 멈추고 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소중함. 그것은 잘 딛고 오르는 자와 그 계단을 잘 정돈하여 좋은 디딤돌로 만드는 누군가의 선한 마음이 하나가 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해인선우는 잘 놓여진 디딤돌이다. 해인사의 구석구석에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누군가를 나아가게 해주는 디딤돌 같은 이들, 이들이야말로 해인선우이다.
떠나간 누군가의 빈자리가 느껴진다면 그들도 틀림없는 해인의 선우였으리라. 해인사를 오르는 계단을 유심히 보시라. 그곳에는 해인선우의 네버엔딩 스토리가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