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더웠던 낮의 길이만큼 잠이 오지 않아 뉘였던 몸을 일으켰다. 풍요로운 번뇌의 파도는 처얼썩 처얼썩 마음을 요동치게 했고, 일순간 거대한 걸음 앞에 새벽의 시간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도자의 삶 속에서 건너뛰어 버린 본질적 물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 이때,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서서 묻고 있다. 복수의 칼날처럼, 회한의 빚으로 말이다. 산중이나 우리사회가 인간답지 않게 화합을 잃고 혼란과 대립, 부조리가 만연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겠지만, 무책임과 무질서등 근본적 타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앞으로만 가려고 생각하고 남은 전혀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일 게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되고만 본바탕은 아무리 채워도 부족을 느끼는 탐욕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되고 욕구로 가득 찬 공동체는 무책임과 무질서가 팽배할 수밖에 없고, 화합이라는 공동선共同善이 깨져 신음하게 된다. 국가와 사회의 비극이나 종말은 궁극적으로 욕망의 극대화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자기중심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이타利他라는 화합의 질서와는 거리가 먼 까닭이다. ‘나’의 이익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남’이 희생되어도 마음의 걸림이 없고 다른 사람의 파멸이나 불행을 보고도 자기에게 피해만 없다면 무관심한 최악의 상태가 되기까지 한다. 산중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깨달음의 미명하에 종종 목도目睹된다. 사람이 경계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서로가 탐욕의 병에 전염되어 진실 된 삶은 증발되어 불안과 두려움이 시대의 흐름 되고 이내 무감각해져간다. 그리고 부처님든, 예수님든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이 신이고 존경받을 분이라 한다. 즉,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생生이 유한하다는 절대모순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탐욕을 좇는다. 마치 화려한 불빛에 끌려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말이다. 자기 삶의 내용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한걸음, 한걸음이 죄를 짓는 일일게다. 그 마음으로는 자신을, 타인을, 나아가 세상을 귀하게 여길 수 없다. 그러니 모순의 욕망 덩어리인 자기를 대용맹심大勇猛心으로 타파하고 부정하여 진실 된 나를 실현해나가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극심한 가뭄으로 금이 간 논바닥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듯, 거북 등처럼 쩌억, 쩌억 갈라진 속아픈 세상에서는 사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에, 꿈을 실현 시키는 방식에 우리는 일대의 공사가 필요하다. 살금살금 비겁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씹으며 거칠게 사는 것 아니라, 먼저 걸어간 이의 삶을 두강 내어 그 자리를 팔아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과거를 도려내는 것은 더 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서로 손잡고, 서로 기대며 정직한 실패와 좌절로부터 함께 일어나야 한다. 사는게 힘들고 바쁘다고, 자신(眞我)을 버리고 자신과 타협하며 사는데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만 옳은 말을 하고, 정작 자기 삶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는 아만我慢, 아견我見을 극복해야 한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이, 그는 빈 그릇 하나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한 집, 두 집..., 그렇게 일곱 집을 돌고 멈추었다. 밥그릇에 음식이 절반도 차지 않았지만 그 는 여덟 번째 집에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밥을 비는 일을 멈추고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반 그릇 밥을 꼭꼭 씹으며 오로지 중생의 삶을 생각 했다. 우리도 멈출 줄 알아야한다. 욕망, 권력과 지위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말이다. 한 집을 더 돌고자 하자 욕심으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데 빛 하나면 충분하다. 뚜벅 뚜벅, 사려 깊고 단단하게, 방일하지 않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한다면 잊혀졌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옹 큰스님의 법문집 “사람”에 나온 글귀를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