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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인물의 반이 이곳에 있다 7 - 문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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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5년 07월 401호
홍류동에는 방문한 여러 선비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이름을 남겨 유가儒家의 성지를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긴 이름들이 많다. 개인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문중, 함께 온 이들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것이 많다. 홍류동을 방문하여 자기 조상의 이름을 보고는감동하여 옆에 새긴 이도 있고, 이미 돌아가신 몇 대조의 이름까지 남겨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제자임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로써 각한 것도 보인다.

1. 황하필黃夏弼(나주진관병마절제도위羅州鎭管兵馬節制都尉 1699)과 그의 아들 황상관黃尙寬(생년1700년), 황상원黃尙元이 새겨져 있다.
2. 박필기朴弼琦 박필리朴弼理 박사눌朴師訥 박사익朴師益 안정현

완재암 하방 계곡에는 문중의 이름이 적혀 있는 바위가 풍파에 깨어져 거꾸로 계곡에 박혀 있다. 글도 아름답고 바위도 매끄러운 화강암이지만 풍랑을 못 이긴 것이다. 반남潘南박씨 문중의 4대조가 함께 다정히 새겨져 있다.박필기朴弼琦 1677년∼1757년. 호는 무취옹無臭翁. 1702(숙종2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7년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1729년 장령掌令,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校, 사간司諫,대사간大司諫, 1730년에는 집의執義, 이후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영조실록英祖實錄》에 따르면,“박필기는성품이 본래 염아恬雅하여 형식形式을 일삼지 않았으며,관직에 있을 때 끼친 사랑이 있었는데, 3품관三品官으로서 나이를 들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일찍이 없었던 바이었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집안에만 있으면서 잣나무열매를 먹었으므로 강건强健하고 병이 없어서 나이 80이 넘어서야 사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박사익朴師益 1675∼1736년 호는 노주鷺洲. 아버지는 참봉 필하弼賀이다. 영조가 등극하자 이조참의를 거쳐 강화유수에 임명되어 강화의 성곽을 보수하였다. 1727(영조3)년 특지로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금원군錦原君에 봉해졌으며,대사헌을 거쳐 형조·공조·예조의 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이 되었다. 박필리의 아들 박사눌과 외손자로 안정현(1730)의 이름이 함께 있다.

3. 남태보南泰普 남태기南泰耆 남헌로南憲老 172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지낸 남태보南泰普와 그의 아들 남헌로南憲老 형 남태기가 홍류동 글씨아래 나란히 각 돼 있다.
남태기南泰耆 1699(숙종25)∼1763(영조39)년. 본관은 의령宜寧. 아버지는 의빈도사儀賓都事 근명近明이다. 보덕·집의를 거쳐 1747년 승지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황해도감사, 도총관, 병조·형조의 참판, 한성부좌우윤 등을 거쳐 1762년 예조판서 겸 내의원제조가 되었으나 동생 태회泰會로 인하여 대간의 지탄을 받고 사직,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성품이 겸손하고 스스로 봉사하는 태도였으며, 지론이 공평하여 존경과 질시를 함께 받았다.

4. 소후유蘇后由 1721 소후첨蘇后瞻
1721년 생원시에 합격한 소후유蘇后由와 형 소후첨蘇后瞻이 각 돼 있다.

5. 취적봉에는 대구진관병마동첨절제사大丘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지낸 이의태李宜泰와 그의 아들 이소李熽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소가 홍류동을 1746년 방문하여 기록하고 이듬해 1747년 식년시에 합격했으므로 과거를앞둔 시점에 방문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병인丙寅1746 중춘이인동쉬래仲春以仁同伜來라는 방문 내용이 새겨져 있다.

6. 윤봉구尹鳳九 윤봉오尹鳳五
1725년 청도군수를 지낸 윤봉구와 1747년 홍천현감을 지낸 그의 아우 윤봉오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윤봉구尹鳳九
본관은 파평坡平. 우참찬 윤봉오의 형이다. 1725(영조1)년 청도군수가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윤봉구의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병계집》이 있다.

윤봉오尹鳳五
1747년 홍천현감을 지냈다. 1714(숙종40)년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1746(영조2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필선이 되고, 부수찬·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홍천현감으로 나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63년 특진관特進官으로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176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7. 정하언鄭夏彦 정주鄭柱 정간鄭杆 정조영鄭祖榮 취적봉에는 1742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정하언과 그의 아들 정간(삼가군수)과 정주 손자 정조영이 새겨져 있다.
정조영은 1846(헌종12)년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8. 조엄趙曮 조정趙晸 조진택趙鎭宅
회선암 바위 상부에 이름을 새기고 붉은 주사로 마무리한 이름이 눈에 띈다. 큰형인 조돈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조엄과 조정, 조정의 아들 조진택이 새겨져 있다. 조엄과 조진택은 삼촌지간으로 모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9. 서봉보徐鳳輔 서화순徐華淳 서희순徐憙淳 서유령徐有寧 서인수徐仁修취적봉을 살짝 돌면 넓적한 암벽이 나온다. 이 암벽에는 달성達城서씨 문중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해인사 7차대화재 때 관찰사 김노경과 함께 해인사 복구에 큰 공을 세운 합천군수 서봉보徐鳳輔(1816~1820)와 1833년 경
상도 관찰사를 지낸 조카 서희순徐憙淳, 부 서유녕徐有寧, 조부 서인수徐仁修 등이 보인다.
서봉보徐鳳輔는 1818년 합천군수를 지냈으며 해인사 대화재시 사찰복구에 힘쓴 공로로 비석거리에 군수서공봉 보대시단영세불망비郡守徐公鳳輔大施檀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10. 서긍보徐兢輔 서정순徐正淳 서중순徐重淳 서당보徐堂輔
홍류동 도롯가 바위면에 서긍보와 자 정순, 중순이 새겨져 있다. 그 위쪽에는 서긍보의 동생인 서당보도 새겨져있다. 역시 서봉보와 같은 달성서씨 문중이다.
서긍보徐兢輔는 1846년 합천군수를 지냈다. 그의 아들 서정순徐正淳은 1871년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간, 형조참판, 도승지, 1899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이 되어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정에 노력하였고 1906년 중추원의장 등을 지냈다.
서당보徐堂輔는 서긍보의 동생으로 1851년 충청좌도암행어사가 되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提學 등을 거쳐1881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그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