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 고려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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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남권희
2015년 07월 401호
-증도가자의 발견에서 논란, 연구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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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책과 전통기록에 관련된 학문을 계속하면서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는 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각각의 자료에는 나름의 숨겨진 사연이 있지만 특히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
록이 나타나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자료일 경우는 여러 가지 논란과 더불어 더욱
우여곡절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러한 경우 중 근자에 들어 필자가 겪고 있는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를 공개하고 발표하면서이다. 우리는 대부분 프랑스 국립도
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에 대
하여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먼저 찍은 금속활자본이며 1377년에 청주의 흥덕사에서 고려 금
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는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간 이 책을 찍은 청주 흥덕사의 위치가
알려지고 학술적인 연구와 청주시의 노력에 의해 그 가치는 물론 세계문화사의 흐름에서 한국
출판문화의 우수성과 그 위상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2010년에 공개된 증도가자는 찍어낸 책이 아니라 <증도가(남명천화상송증도
가)>라는 책을 찍었던 금속활자 자체로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이백수십개에 달하고 있다. 이
<증도가>라는 책은 원래 당나라 때 현각 스님이 득도한 후 남긴 게송으로 그 후 송나라의 법천
스님이 이를 쉽게 풀이한 책이다. 이 <증도가>에 대한 주석서는 몇 종이 전해지고 있고 고려의
금속활자인쇄와 관련된 책은 1239년 최이가 몽고를 피해 천도한 강화도에서 개성으로부터 가져
온 활자본 1부를 널리 배포하기 위하여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이며 현재 2본이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이 책의 발문에 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찍어낸다는 기록이 있어 전후의 사정을 감
안한다면 처음 활자본은 개성에서 1232년 이전에 찍은 책이 되는 셈으로 기록상 최초가 되는 이
활자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그 누구도 하지 못하였다.
그간의 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것이지만 이 활자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지금도 개성의
고려 궁성인 만월대지역과 강화도 궁궐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활자의 존재는 2010년 9월에 처음 공개되었지만 실제 필자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004~5
년경으로 당시는 30분 정도의 주어진 시간으로 진위의 여부를 감정할 충분한 시간이 없어서 일
단 잘 만들긴 했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8~19세기경에 주조된 10여만자의 금속활
자들과 너무도 형태적으로 달라 일단 가짜일 것으로 판단하고 말았다. 그 후 두 차례 다시 볼 기
회를 가졌고 마지막 소장자에게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 짧은 시간이나마 글자의 서체와 만
드는 방법, 물리적인 형태 등을 비교한 결과 활자 표면의 금속의 마모, 훼손 상태나 글자 획 사
이에 잔류된 먹과 이미 2003년에 증도가의 목판본 서체를 대조하였던 작업 데이터와 비교한 결
과 실물이 진품활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정확한 발굴 장소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고의 실물활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면 학계는 물론 일반대중마저 쉽사리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단은 활자 실물을 중심으로 데이터를 확보하고 인문학적,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
도록 연구의 기간을 늘리고 발표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또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이 확신을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후 발견
된 활자들을 책의 서체와 전부 대조하고 관련된 인본을 확인하던 중 고려시대 대문장가였던 이
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전집>도 같은 활자로 찍어 목판에 번각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모든 글자를 증도가 책에 나타난 글자와 일일이 대조하여 그 저본은 모두 동일한 활자로 찍어낸
것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그간 교과서 등에 언급되었던 최초의 기
록인 1234년경 금속활자로 찍은 <고금상정예문>, 1241년 목판으로 다시 찍었던 <동국이상국전
집>과 더불어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후 1239년에 목판으로 다시
찍었던 <증도가>를 포함하여 이 3종은 모두 10년 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1232년과 1241년
사이에 간행한 책의 글자체가 모두 같다면 당연히 그 가운데에 속한 <고금상정예문>도 같은 활
자일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시 몽고와 치열한 전쟁을 하는 와중에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드
는 활자를 다시 만드는 여유는 없었을 것이므로 그간 학계에서 막연한 추정만 했던 활자의 실체
를 보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활자는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처음에 숫자를 전부 공
개하지 않으려는 소장자의 입장이 있었으나 가능한 한 많은 양이 공개되어야 인정을 위한 객관
적 데이터가 많아진다는 점으로 설득하여 차례로 12점, 70점, 101점으로 점차 공개의 숫자를 늘
여갔다. 활자에 대한 논란의 내용은 글자의 서체가 완전히 같지 않고 전존된 형태가 지난 세월
에 비하여 너무 온전하며 기능적으로 인정하기 위하여 먹을 묻혀 찍어보아야 한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논란 중 일부는 실물 활자를 보지 않았거나 처음의 공개된 숫자가 적어서 일어난 오해도
있었고 궁극적으로 활자인본의 상태와 이를 후에 뒤집어 새긴 번각본에 대한 서지학적 지식이
부족한 점에서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부의 언론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점을
지적하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당시 활자 획에 잔류된 먹에 대하여 KBS 역사스페셜팀의 주
도로 방사성탄소연대분석 시도를 일본의 팔레오 라보사와 국내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팀에 의
뢰하였고 그 결과 먹의 사용시기는 1270년 이전이라는 데이터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후 먹의 분석은 3차례 더 실시되었고 대상활자는 20여자에 이르렀다. 글자의 서체에 대한
분석도 미술사, 서예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에 의하여 13세기 초라는 것이 추정되었다. 그밖에
필요한 추가적인 연구로 청주의 기초과학연구원에서 활자 표면의 납을 분석하여 납의 산지가
충청북도 괴산근처에서 전북에 이르는 지역으로 분포를 좁힐 수가 있었다. 금속성분에 있어서
는 비파괴 분석을 통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복’자와 유사하게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
었고 나아가 활자의 외부가 아닌 중심 내부의 성분을 파괴분석을 통하여 구리가 약 80%, 주석
이 7~8% 등임을 밝혔다.
이 활자에 대한 여러 의구심은 과학적인 실험과 분석으로 증명이 되고 있지만 출처에 대한 끊
임없는 의구심에 대하여 일제강점기 때 개성부근에서 확보되어 일인의 소장으로 되었다가 근
자에 구득된 것이라는 소장자의 의견과 근자에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되어 중국을 거쳐 들어왔
다는 등 전래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다면 실물 자
료에 의거하여 그 형태와 주조방법, 먹의 분석, 금속의 성분분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진본임
을 증명할 수 있으며 전래 인본과의 글자 대조를 통하여 충분히 인정할 만한 데이터를 확보하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물에 의하여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은 일부의 연구자나 관심을 가진 사
람들의 막연한 거부감으로 무작정 세계적으로 중요한 최고의 유물을 흠집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여러 측면의 진본 견해나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위작으로 주장을 펴
는 사람들은 특정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어떠한 연구나 분명한 입장 표명도 없이 그냥 심증적인
추론만 구구할 뿐이다. 이제는 분명한 자기의 실명을 걸고 학술적, 구체적 증거자료로서 반박을
해야 합당한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물과 관련한 많은 경우 그 중요성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그야말
로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물을 무지나 입담으로 폄하하는 어리석음이 있
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현재 이 활자들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연보에 수록되고 미국과 일본의 관련분야에서 발표되었
으며 방사성탄소연대분석에 의한 먹의 분석도 외국의 학술저널에 수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아직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지정을 위한 분야별 위원회만 구성해 둔 실정이다.
이 활자를 연구한 여러 사람들은 문화재로의 지정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구텐베르크활자
와 직지를 찍은 활자의 실물이 없는 이때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가장 빠른 시기 최고 활자의 실
물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실물 고려 금속활자가 문화창조의 대표로서
인정되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