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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해인 평생 구독회원 이상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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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5년 06월 400호
도시의 어둠을 머금고 밤의 시간 속에서 묵었다. 어느 달동네의 길 위에 있었고, 걸어 오르다가도 두세 번은 쉬어야 했으며, 여느 슬라브 지붕 집들 중의 하나였다.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외로움과 따뜻함, 그 어느 중간이기도 한 곳에 <해인>편집실이 있던 시절이었다. 한 달을 돌고 돌아 <해인>만의 색깔과 속도로 세상 속으로 스며들던 그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한눈에도 외골수 뚝심이 보인다. 편집실에 오실 때마다 매번 필요한 게 없는지, 뭐 도와 줄 일 없는지 물어 보시고 예순을 넘기신 연세에도 항상 적극적이시다. 또한 옛날 옛적이었을 법한 서울 편집실 시절의 이야기를 한 조각씩 들려주시곤 했다. 스스로를 <해인>에 적을 둔 독자라고 소개하시는 이상규 님을 해인선우에서 만났다. 청년시절부터 함께한 도반인 <해인>과 400호를 맞았다. 변함없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결같을 수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해인>을 향하는 변함없는 그 마음이 궁금해졌다.

‘달동네 편집실’
대구에서 개인 사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중에도 틈틈이 서울까지 <해인> 편집실을 오가던 때였다. 아현동 달동네에, 것도 번듯한 사무실도 아닌 낡은 가정집에서 그렇게 <해인>이 매달 자라나고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겐 하나같이 청춘의 열망 같은 무언가가 아련히 떠오르는 듯 엷은 미소가 있었다.
법성 거사님에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던 듯 했다. “기억에 편집실 가려면 한 번에 못가고 꼭 두세 번
은 쉬었다 갔어요. 산비탈에 있던 조그마한 가정집이었는데 비도 셀 정도로 낡았었구요. 지금은 편집장이지만 당시에는 편집부장으로 성전 스님이 계셨죠. 직원이라고 해봤자 보살님 한 분 계셨고. 제대로 된 간판도 없길래 돌아와서는 ‘스텐’으로 월간해인 편집실 간판을 만들어 가지고 또 올라갔죠. 그 때 성전 스님 고생 많으셨어요.”

세월이 지긋이 내려앉은 자료 더미들 속에서 법성거사님이 보여주신 것은 성전 스님께서 보내주셨다는 연하장이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편집실을 살펴주는 <해인>에 대한 그 열정을 스님께서도 충분히 공감하셨나 보다. 연하장을 들여다보니 한 자 한자 반듯하게 써내려간 글씨와 행간에서 고마움이 전해졌다. 그러한 연하장부터 사진 한 장 한 장에까지도 녹아든 <해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2000년 4월 6일 편집실은 서울에서 해인사로 이사를 왔다. 그 후에는 <월간해인 필자와 독자와의 만남>, <해인가족모임>이란 이름으로 1998년부터 매년 12월에 6차례 진행되었다. 행사의 마지막 일정은 항상 마애불 참배였다. 이제는 빛바래진 사진들중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행사를 돕는 법성 거사님도 있었다
“처음 해인가족모임을 열 당시에는 해인사의 세면장이 완비되어 있지 않아서 한겨울에 시냇가 얼음 깨서
세수하고 했어요. 또 1999년 4차 때에는 송광사에서 오신 스님 두 분도 함께 했었죠. 송광사 사보를 기획하던차 해인지를 참고하려고 오셨을 만큼 당시 해인지의 명성이 높았었죠. 그리고 마지막 해인가족모임 참가자가241명이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행사가 진행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법성 거사님의 <해인>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정확한 기억력도 놀랍다.

“절에 오면 뭐라도 하나 배워가야죠”
이십대에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에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는 믿는 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절에 와서 하나라도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해인>과도 인연이 닿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확고한 신념을 행동으로 즉각 옮기시듯 지인들에게도 선물할 일이 있으면 <해인>을 법보시 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해인사 큰스님이셨던 도견 스님이 계실 때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해인사를 방문한다고 했을때 사중의 모든 스님이 마중을 나갔는데 도견 스님만은 가지 않으셨다고 했다.‘중이 절을 지켜야지, 어딜 가!’라며 호통 치셨다는 일화를 들려주시며 이것이 바로 불교 정신이 아니겠냐고 짚어 주신다. 불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며 힘주어 말한다.

스스로를 <해인>의 골수분자라고 하면서도 바람도 털어 놓는다.
“해인지 독자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해인사에서도 해인지 제작지원에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해인가족모임이 다시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들과 직접적인 교류가 필요해요. <해인>의 독자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방송에 저녁시간, 아침 말고 저녁시간이어야 해요. 일하고 돌아와 저녁 먹고 씻고 나서 하루를 마무리 할, 9시 정도에 자막만이라도 넣어서 광고하면 예전에 해인가족모임에 참석했던 분들은 대번에 알아보고 ‘아!’ 할 겁니다.(웃음)”
아니나 다를까 법성 거사님께서 인터뷰 준비한 메모를 그대로 옮겨 보면 ‘※ 해인 편집장 종현 스님.
고생이 많으시지만 해인가족모임을 존속시켜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정말 또박또박 쓰여 있다.
또한 다른 지역보다 대구는 불교가 자리 잡기 힘든곳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하셨다. 최근에는 대구에 있는 해인사의 말사 포교원이 자리 잡히도록 여러모로 활동한다 했다. 인연이 깊은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법성이 넌 꽃 피우는 것을 잘 하니, 거기 가서 일을 도와 꽃피워봐”라고 하셨다한다. 지금도 그 말씀을 따라 새로운 숙제를 하시는 것 같았다. 얼굴의 주름이 늘어가고 검은 머리카락이 세어져도 불교에 대한 배움의 갈증은 더욱 커지지시나 보다.

법‘법法’자에 이룰‘성成’. 이 불명처럼 어느 곳에서든 법보시를 권하게 되었다.“글이나 책이란 건
가까이 두고 있을수록 좋잖아요. 그러니 해인지는 옆에 두고서 공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기념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에는 지인들에게 <해인>을 법보시 하신단다. 때때로 편집실로 전화하셔서 <해인>구독 신청자의 주소와 이름을 일일이 불러 주시는 수고로움부터 편집실 방문하실 때마다 꼭꼭 제철 과일을 안고오시고. 편집실에 손이 가는 일도 척척 도와주신다. 편집실로 발길을 향한 순간부터 이미 <해인>에 대한 마음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떻게 가능할 수있을까 싶다. 군대를 다녀온 경험은 없지만 법성 거사님을 옆에서 보면 <해인>과‘전우애’로 묶여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실을 나서면서도 인사처럼 매번 “편집실에 필요한 거 있으면 꼭 연락해
요!”라고 하신다. 아무리 봐도 진득한 의리 같다.

도시의 달동네에서 자란 <해인>이 훌쩍 자라 홍류동을 흐르는 물처럼 세상의 낮은 곳으로 그 낮은 곳으로 스며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