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칫했다면 나는 그 당시 동국대 총장 백성욱 박사의 권유로 동국대 졸업반에 무단 편입되어 동국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총무원장과 해인사 주지를 겸임하는 청담 스님의 권유로 가야산에 갔다. 어쩌면 당신의 상좌들이 소임을 다 맡는 것이 찜찜한 나머지 나더러 ‘토굴수좌가 서울 중 되면 사탄 귀신되기 십상이니 산중에 가서 바람소리 좀 들어보지’라고 은근히 내 등을 밀었던 것인지 모른다.
가 보니 혜정이 재무 맡고 혜원이 무엇을 맡고 있었다. 마침 퇴설당에는 신참내기 내 효봉가문의 법정도 와 있었다. 나는 주지화상의 뜻대로 교무를 맡아야 했다. 뒷방과 앞방이 겹으로 된 내 처소에 시봉행자가 붙었다.
내가 매번 나선 일이 있다. 선방 수좌 몇과 강원 학인 몇 십 명이 일주문 앞까지 비질 청소를 하는 운력에 앞장섰다. 좀 더 있다가는 강원 학인들의 편지왕래가 눈에 띄어서 편지를 금지 시켰다. 수학여행의 여대생들과 신소리 오고가는 것들이어서 그랬다. 내 별명이 바로 ‘스탈린’이 되었다.
나는 대중공사나 펼치고 종무소에나 왔다갔다하는 노릇이 싫어서 퇴설당 아래에서 단식정진을 꾀했다. 선방 수좌 하나와 중강中講 몇 사람도 따랐다. 용탑선원 위의 오두막 토굴에 사는 정천에게 요령을 들었다. 또 진주에 사는 청담 스님 세속 장녀의 남편인 김동은처사한테 관장기구를 구해오게 했다. 예비 단식 일주일 후에 본 단식이었다. 3일 뒤 심신이 맑아졌다. 며칠 후 관장으로 대변은 자갈덩어리였다. 30일 목표 앞두고 28일째 청각이 끝나버렸다. 화두도 도망쳤다. 숭늉 한 수저를 입안에 적셨다. 이튿날 몇 수저를 더 적셨다. 귀가 살아났다.
1960년 4월이었다. 혁명이었다. 비구승단을 지탱해 주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그러자마자 해인사 대처승 세력을 주도하는 왕년의 학승 변설호 등 일진이 해인사를 접수하려고 들이닥쳤다. 선방 수좌들도 바랑지고 튀었다. 종무소 간부도 떠났다. 달랑 남은 강원 학인은 10대 후반 갓 20대의 사집 사교반이었다. 나는 그들을 단합시켜 큰방에 가사장삼의 법위로 부동 가부좌 입정에 돌입했다. 대처승 측이 동원한 야로나 치인리 신부락 젊은이들도 감히 나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자 대처승 지휘부는 아예 대적광전 아랫마당에 큰 항아리 두 개를 져다 놓고 거기에 막걸리 통 몇 개를 부어서 그 항아리 막걸리를 먹어가며 취중 난동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는 술 취한 무리에 의해 가사장삼 그대로 질질 끌려가 구광루 아래 돌계단에 내 머리가 찧어서 피가 낭자했다. 또한 가사도 찢겼다.
대처승 여섯 원로 중에는 강원 조실을 맡고 있는 강고봉 화상도 끼어 있었다. 내가 외쳤다. “간에 붙고 쓸개에 붙었소 그래!” 그들은 나더러 해인사 인계인수로 해인사 직인을 찍어 정식으로 사찰운영권을 내놓으라 했다. 그때 나는 그들의 허를 찔렀다. 직인의 소재를 모른다는 회피가 아니라 내가 품고 있던 직인을 그들에게 꺼내 보였다. “이것이 해인사 직인이냐? 아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당신들은 내 몸을 죽여야 이 직인이 당신들의 것이 된다. 나를 때려 죽여라. 불태워 죽여라 소신공양! 얼마나 나의 생사 통쾌할테냐!” 이렇게 단말마로 소리쳤다. 그들이 기가 죽어 슬슬 일어났다. 몇몇 학인들이 이 광경에 감동한 나머지 엉엉 울었다.
그날 저녁 대구에서 석昔모라는 고급장교가 달려 왔다. 해인사 사태를 수습하려는 불교신도인 군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해인사 신부락의 파출소에 가서 대처승에 따라붙은 사람들을 다 방면하라 했다.
이 공적으로 그 후 가야산 산중회의에서 나를 주지로 추대했다. 그러나 지족암에 주석한 중견승려가 20대 수좌를 벌써부터 큰 절 주지직에 앉히면 그 전도를 버리게 된다고 맞서서 주지 대리로 타협했다. 그 당시는 총무원장 임명보다 산중 원로에 의해서 주지 노릇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오라는 지시가 나에게 왔다. 종정 하동산 스님이 가람 수호의 덕이 크다고 칭찬한 나머지 나를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때마침 나는 불교신문의 주필 겸 단골 필자노릇도 해야 했다. 그래서 먼 속리산 대신 1일 생활권인 강화 전등사 주지 박추담을 나대신 법주사 주지로 보내고 내가 전등사를 맡아서 서울의 불교신문 살림도 함께 하게 되었다. 추담화상은 평소 나와 어느 정도 친밀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전등사에 쌀 한 톨도 남겨놓지 않고 주지실 벽에는 수십 개의 한약방 약봉지 걸어놓는 못들만 박혀 있었다. 주지 부임의 첫 업무는 그 못들을 장도리로 뽑아내는 일이었다. 이어가 군청에 달려가 구호양곡을 얻어다 잡곡밥 끓여먹는 일이었다. 아니 아랫마을 온수리 신부한테 쌀 한말 꾸어오는 일이었다.
이 전등사시대 나는 마니산을 몇 번인가 올라갔다. 여름밤 철야정진도 해보았다. 그때 나는 종교냐 예술이냐의 기로를 선택하는 극도의 고민에 사로잡혔다. 1962년의 환속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돌이켜본다. 1950년 말~1960년 초의 해인사 몇 년의 그 충실성은 항상성은 모자라되 그 말뚝신심으로서의 내밀성은 내 삶 가운데서 아직껏 하나의 정금精金 덩어리였다. 또한 여기 특기할 바는 내 첫 시집 <피안감성>이 그 해인사 시절에 나왔다. 혜정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1980년대 후반 조계종 전 종단의 개혁이 선포되는 전국 승려대회가 있을 때 나는 비밀강사로 당국의 눈을 피해 홍제암에서 현응 수좌의 보호아래 대기하고 있었다.
아 홍제암 사명대사비는 일제 말 왜경의 수난을 이겨내고 오늘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한국현대불교의 한 표상인 백용성의 유훈도 용탑선원에 남아있다. 어디 그뿐인가. 고래 난세의 희랑이 화엄종의 북파거두로 왕건을 지지해서 찬란한 해인사의 운명이 가능했다.
아 해인사! 해인사의 ‘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