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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시절의 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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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성전 2015년 06월 400호
김천 수도암 방부에 떨어지고 어두운 산길을 내려올 때 전화가 왔다. 해인지 편집장 진각스님이었다. 편집장을 한번 해보라 했다. 순간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길은 어둡고 바람은 너무 찼고 갈 곳이 없었다. 주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나와 <해인지>와의 첫 인연이었다.
며칠 후 나는 아현동에 자리한 편집실을 찾아갔다. 나는 좀 그럴듯한 규모의 사무실을 생각했다. 나의 추측은 오판이었다. 그것은 골목길 언덕에 있는 낡은 스레트 집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바람에 덜컹거리는 낡은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소임을 넘기고 싶었지만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스님은 너무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마치 이제 살았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스님은 떠나고 나는 낮선 서울에서 그것도 빈민촌의 판자집 같은 데서 생소한 일들을 하나씩 익혀가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고 작가들의 리스트도 확인해 보고 책을 만드는 기획사도 찾아가 보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밥은 사무를 보시는 분이 해주어서 점심 한 끼는 그럭저럭 먹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 나는 마음씨가 좋은 분들과 함께 했기에 먹는 문제가 좀 수월한 편이었다. 대개는 저녁까지도 지어주고 가려고 많이들 마음을 써주고는 했다.
혼자 남게 되는 저녁 시간이 나는 좋았다. 집은 비록 낡았으나 그 집에도 멋진 풍경이 있었으니 감나무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대 기숙사 너머에 지는 노을이었다. 모두 외로움을 채색하는 풍경들이었지만 나는 그때 오희려 외로운 것들이 좋았다. 만약 외로움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도시의 저녁 시간을 아마 성찰 없이 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외로움이 있고 외로움을 일깨우는 풍경이 있어 나는 서울 속에서도 나를 만나고는 했었다.
편집장을 하면서 나는 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직접 만난 분도 있고 또 전화로 만난 분도 있다. 직접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신경숙 소설가이다. 그는 마치 그의 작품의 틀 속에 살고 잇는 사람만 같았다. 그와 함께 차집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시간은 범접할 수 없는 느림과 고요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신비 아닌가. 그의 작품에 흐르는 전반적인 아우라를 나는 그와의 만남에서 일거에 느낄 수가 있었다.
또 한 번은 작고하신 전 우익 선생이 편집실을 직접 찾아왔다. 그는 정말 시골에서 농사짓는 촌로만 같았다. 양말을 빨아서 말리고 하룻 밤 제집처럼 자고가자는 그의 청이 그 때 참 정답게 다가왔다. 그때도 그는 ‘촌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분이었다. 그 소탈함 그리고 아주 맑고 예리한 눈빛. 나는 그때 그이 눈빛이야말로 ‘진공묘유’라고 생각했다.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서울시장이 되었지만 그 때 박 원순 시장님도 우리 해인지의 고정 필자였다. 그때 그는 참여연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아현동 편집실을 찾아왔을 때 나는 그의 구두를 보고 그가 운동하는 사람 맞네, 하고 긍정했다. 그때 그의 구두는 떨어져 있었고 아주 낡은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서울 시장으로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 서울시장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낡은 구두가 남긴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진작가 주 명덕 선생도 기억이 또렷하다. 선생과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취재를 나갔다. 아침이면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떠나는 것이 선생의 스타일이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조식을 하는 것이 내게는 생경한 일이었지만 좋았다. 선생과 호텔을 드나들면서 호텔이 주는 위압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촌놈이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은 호텔에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다 선생과의 인연 덕이다.
매달 초가 되면 원고 청탁을 하고 또 원고를 받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그때는 아마 원고지에 써서 직접 보냈던 것 같다. 원고가 마감 날 오지 않으면 참 많이도 애가 탔다. 몇몇 유명한 작가들은 내게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다. 청탁자가 감히 유명 작가에게 쓴 소리를 하다니. 그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중이기에 나는 겁도 없이 쓴 소리를 했고 작가들은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해인지 편집장을 한 4년 한 것 같다. 그것은 내 생애 아주 색다른 경험이고 유익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그때 편집장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중으로야 살겠지만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고 아마 선방을 다니며 살았을 것만 같다. 선방 방부가 안 돼 우연히 시작한 편집장 생활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 생활이 나는 가끔 그 때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만큼 글을 많이 쓰고 사는 스님도 없지 않나 싶다. 물론 글의 질이나 가치를 논하자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천성이 게을러 원고 청탁을 받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 편인데도 나는 그간 열권의 책을 냈다.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또 반대로 자랑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의 모든 시작이 편집장 시절에 있다. 그러니 그 시절을 어떻게 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