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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인물의 반이 이곳에 있다 5-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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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5년 05월 399호
16. 윤양후尹養厚(1729 ~ 1776)는 1774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775년 세손(世孫 : 정조)이 대리청정하게 되자 홍인한洪麟漢과 이를 극력 반대,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배척하는 등 벽파로 활약하였다가 정조가즉위한 1776년 정후겸鄭厚謙과 더불어 해남에 유배되고 이어 신문을 받던
중에 고문으로 장사杖死된 인물로 나와 있다. 형 윤상후와 윤현후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17. 조시준趙時俊은 1780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용근金龍根(1838 ~1841)합천군수와 나란히 새겨져 있다.

18. 조진택趙鎭宅은 조정의 아들로 1794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한때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장단·김천·수원 등지의 민정을 조사, 보고한 인물이다. 회선암 바위에 부父조정과 함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 이조원李祖源은 1790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20. 이태영李泰永 1795년 경상도관찰사로 대구 칠성동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1795년 경상도관찰사로 등용되어 각종 묵은 토지의 등급을 낮추고조세의 부담을 덜어 주어 농사를 권면하는 데 힘썼다. 1797년 곤양군昆陽郡에서 봉산封山의 소나무 관리를 잘못한 죄로 경상도관찰사직에서 파직
당하였다가 대사간으로 다시 등용되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태영은 대구 칠성동과도 관련이 있다. 1795년(정조 19), 경상감사 이태영의 꿈에 대구읍성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내려온 것을 보았다. 다음날 그곳에서 7개의 큰 바위를 발견하고 7개의 바위에다 7명의 아들 이름을 하나씩새겨 기원하였더니 형제 7명(이희갑李羲甲 이희두李羲斗 이희평李羲平 이희승李羲升 이희준李羲準 이희조李羲肇 이희장李羲章)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되었다고 한다. 칠성바위는 현재 지하철 대구역사 광장에 옮겨져 있다.이후로 7개의 바위는 칠성바위로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칠성동의 지명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이름이 홍류동 제시비 후면과 회선암 두곳에 각각 새겨져 있다.
홍류동 정중앙에는 관찰사 이태영과 그의 자손이 5대까지 새겨있다.
이태영과 형 이도영, 일곱아들 중 세 아들 이름이 있다. 이희평李羲平, 이희두李羲豆, 이희승李羲升. 그의 손자로 이정재, 이풍재, 이승기 등이 새겨져 있다. 회선암에는 이태영의 조상들이 새겨있다. 이태영李泰永과 부 이산중李山重 조부 이병건李秉健 증조부 이집李潗의 이름이 나온다.

21. 김화진金華鎭(1728 ~ 1803)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22. 남공철(1760∼1840)은 1802년(순조 2)에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으며 글과 서예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홍류동 환선대에 눈에 띄리만치 큰 글씨로 각이 되어있으며 글의 조형미 역시 뛰어나다.

23. 김노경金魯敬은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1817년 해인사 6차 대화재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해인사 복원에 앞장서서 해인사에 공덕비가 세워있다.
순상국김공노경승공덕비巡相國金公魯敬勝功德碑

24. 조인영趙寅永은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1758년 경상도관 찰사를 지낸 조엄의 손자이며 홍류동 회선암에 이름이 남겨져 있다.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만영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김씨를 압도하고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해동금석존고 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
을 주었다.

25. 김양순金陽淳(1776∼1840)은 1832년(순조 32)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인물로 농산정 정자 앞 바위에 이름이 세겨져 있다. 1825년 이조참판에 올랐고, 1827년 대사헌에, 1833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헌종이 즉위한 뒤 1838년(헌종 4)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1840년 모역혐의를 받고 투옥되어 국문(鞫問: 신문)을 받던 중 심한 고문에 불복하다가 죽었다. 취적봉과 홍류동 제시비에 각이 돼 있다.

26. 서희순徐憙淳 1833년 경상도관찰사 서신수信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유녕有寧이고, 아버지는 군수 응보應輔이다.
1816년(순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어서 이조참의, 대사간,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예조참판,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33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27. 조병현趙秉鉉 (1791;정조15 ~ 1849;철종)은 1834년(순조 34)~1836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홍류동 벽에 각이 되어 있다. 만영萬永·인영寅永·병구秉龜 등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으며 천주교를 탄압한 기해박행의 중심인물이다.
경주시 안강읍 안강리 안강문화회관에 관찰사조병현영세불망비觀察使趙秉鉉永世不忘碑가 있다.

28. 김도희金道喜는 1839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제 김돈희金敦喜와 함께 새겨져 있다.

29. 홍재철洪在喆 1840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799년(정조 23)∼미상. 자는 치경致敬이다. 동생 홍재혁과 함께 새겨져있다.

30. 이계조는 1845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류동 벽에 새겨져 있다.

31. 조시영曺始永은 1897년 경상도관찰사가 된 인물로 회선암 정상부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흥양·고령군수, 여산부사礪山府使,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 경상도관찰사1897 등을 역임하면서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치적을 남겼다. 해인사는 1898년 제6차 인경불사를 하여 1899년 4월20일 대장경 4질을 인경하였다. 4질을 인경한 기념으로 상궁 최송설당과 김현국이 가마1좌, 의장, 좌복40건, 침장, 탁의, 경의금 등을 보시하며 7일 동안 대장경 1질을 전독한 후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에 각 1질과 1질은 각처의 명찰에 보
관하였다. 그 발문을 관찰사 조시영이 지었다. 당시 판서 이용직이 황금 1500냥을 시주하고 대적광전 삼존불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을 개금하였다.

32. 신석우申錫愚(1805;순조5 ∼ 1865;고종2)는 1855년(철종 6)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33. 남일우 南一祐는 1886년 경상도관찰사가 된 인물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1876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79년에는 그해의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뒤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886년에는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 점차 훼절毁絶되어가던 조선조의 기본법전인《대전회통》·《대명률大明律》·《무원록無寃錄》등을 개간, 인출印出함으로써 형정刑政에 공헌하였다. 그해에 공조판서에 올랐다. 부 남병선南秉善, 조부 남태순南太淳, 증조부 남주헌南周獻(1808함양군수), 고조부 남인구南麟耉의 이름과 함께 홍류동 벽에 새겨져 있다.

34. 김명진金明鎭 1888경상도관찰사 본관은 안동安東. 1873년에 별겸춘추別兼春秋가 되고, 이듬해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좌도에 파견되었다. 1879년에 동부승지를 거쳐 1882년에는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뒤 춘천부사를 거쳐 1886년 경기관찰사, 1888년 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에만 5년 이상 근무하였다.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35. 민정식閔正植(1848;헌종14∼?)은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으로 1890년 경상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이름이 낙화암 암벽에 새겨져 있다. 1885년 성균관대사성, 1886년 이조참의, 1888년 홍문관부제학, 경상·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조선 말엽 척족 민씨의 한 집안으로
권세가 당당하였다.

36. 조병호는 1894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절승대 뒤편 암벽에 새겨져 있다.

37. 민영선閔泳璇(1815;순조15~미상)190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조선 말기 문신으로 형은 민영익閔泳翊 · 민영기閔泳琦이다. 경상남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던 1906(광무10)년 1월에는 탐오한 행위를 한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올라오라는 전보에 불응한 죄로 파면되었다.

38. 조기하趙夔夏는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낙화암 암벽에 새겨져 있다.

39. 이재현李載現은 1901년 경상도관찰사이다. 홍문관교리와 궁내부특진관을지냈다. 궁내부특진관, 특명영국대사, 특명일본국대사, 한국적십자사총재를 지낸 동생 이재각李載覺과 함께 회선암 능선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