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일요일 지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린다. 어느 날 보존국장에 성안 스님이 부임한다는 말을 들었다. 1년 선배이고 활발했던 이미지 때문에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어느 날 택시에서 내린 스님은 나를 의아하게 했다. 울 소재의 승복을 세탁기에 돌렸는지 아래위로 쭈글쭈글한 것이 다림질도 안하고 두루마기도 입지 않았다.
“스님 오랜만이야. 나 좀 잘 봐줘. 아무것도 몰라.”
위아래로 살피는 나에게
“해외에서 막 들어와서… 옷도 없고 ”
평소 다림질을 안 한다고 했다. 그만큼 바삐 다니고 활발했던 스님이었다.
대장경에 대한 애정과 학술적 고뇌가 깊었던 스님
본격적으로 보존국장 소임을 살면서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 학술행사, 문화행사를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분주했다.수차례의 세미나를 하면서 늘 논쟁의 중심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대장경을 조성한 판각처가 어디며 기존 학설대로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운한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성안 스님은 늘 한결같은 말을 했다.
고려시대 강화도에 설치된 대장도감은 행정관청이며(지금의 문화재청이 대전에 있는 것처럼) 남해, 진주, 지리산, 해인사 등지에서 나무와 각수들을 모아 조성했고 그 대장경을 삼재불입처로 알려진 해인사에 바로 모셨다
는 것이다. 실제로 대장경을 해인사로 이운했다는 1398년 이전 기록에도 대장경과 판전에 대한 기록이 해인사에 나오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전란의 한복판에 있었고 언제든 몽고군이 쳐들어올 수 있어서 늘 전시상태였으며 대장경을 조성할 물적, 인적 토대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당시 나로서는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늘 열정적으로 토론과 조사에 임하는 스님을 보며 출가자 중의 전문가로 성안 스님은 여러 교수나 학자를 능가할 스님으로 보였다.
창건 이래 최대의 축제 2011, 2013 대장경세계문화축전
성안 스님은 일복을 타고난 스님이다 . 2010년 국장소임으로 오면서 창건 이래 최대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세계문화축전을 두 차례나 지냈다. 45일간 2백만의 인파가 찾아왔고 국내외 언론, 방송에
서 많은 취재가 이루어졌으며 당시 스님은 많은 인터뷰와 취재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스님의 모습을 회상하면 5분가량 나가는 방송도 세 시간, 네 시간 촬영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스님은 단 한 번도 인상 쓰지 않고 촬영시간 내내 장경판정과 대장경을 지켰다. 당신은 인터뷰만 하고 나머지는 실무자에게 맡기고 내려올 법도 한데 행여 촬영 중 훼손이 일어날까 우려하며 촬영시간 내내 자리를 지킨 기억이 난다.
촬영 끝나면 늘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
“스님, 나 괜찮았어?”
축전 기간에 대장경 보존회원 구축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가 떨어졌다. 후원회원을 팔만명 모집하는 이 사업은 취지와 명분은 훌륭하나 사람들에서 설명하고 접수를 이끌어 내야 하는 말 그대로 대장경 영업사원이 되어야 했다. 전국 사찰 행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범어사, 안국선원, 통도사… 해인사에 단체로 성지순례나 템플스테이 오는 팀들이 있으면 늘 나아가 마이크를 잡고 대장경 보존에 힘을 보태주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존회원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만 명이 넘게 되었지만 이후 성안 스님 입적 후 이 사업은 다시 정체상태이다.
다시 새로운 열정과 신심으로 무장한 소임자가 와서 이 사업이 마무리되기를 기대해본다.
곁에서 4년간 함께 뒹굴며 소임을 살았지만 내가 본 성안 스님은 말 그대로 천진도인이다. 이름도 어찌 그리잘 지었는지 성 안내는 스님으로,‘못합니다, 안됩니다’란 말을 쓰지 않은 열정적인 스님으로, 그리고 인정하긴 실지만 보기 드물게 나보단 잘생긴 스님으로 기억이 남아 있다.
선배면서도 늘 도반처럼 어울린 스님. 큰 일을 마치고는 늘‘나 잘했지!’하며
생글생글 웃던 성안 스님.
1주기가 다가오며 문수보살의 게송이 생각난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서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