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깊은 골을 타고 온 바람이 거세게 흐른다. 나뭇가지를 만나면 세차게 훑기도 하고, 채 바스라지지 못한 낙엽들이 제 몸 구르며 내는 마른 소리도 들리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의 갖가지 소리들도 들려온다. 해인사에도 이렇게 꽃샘추위가 지나가나 보다. 이윽고 그러한 소리들이 잦아들면 제 할 일하는 새들의 부지런한 지저귐들과 햇살에 부화한 꽃망울들이 톡톡 터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리 피어선 꽃들이 길을 밝히면 마치 기다란 제등행렬의 마중을 보는 것 같다. 이십여 년 전의 어느 봄날을 거슬러 오르면 그곳에는 해인사가 있다. 가야산골 청년들이 밝힌 등불이 지금도 꺼질 줄을 모른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길 위에 되살아 날테니 말이다. 사하촌에서 삼대三代를 이어 뿌리내려 살아가는 민병문 님이 풀어내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 추억이 따땃한 봄날처럼 푸근해진다. 14km 피어난 연등
굳이 ‘불교’라고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을청년회가 불교청년회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한다. 이십여 년 전, 당시 민병문 님이 청년회 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숭산청년회, 가야청년회, 해인사청년회의 회원들이 해인사와 지역을 위해 할 일을 모색하다가 팔만대장경 축제를 기획하고 추진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금을 모으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각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받기도 하며 다녔지만 여전히 기금은 부족했다. 논의 끝에 청년회장이 보증을 서고 대출을 받아 진행했다고 했다. 해인사의 상징을 찾다가 야로에서 해인사까지 장장 14km 길에 청년회원들이 참여하여 손수 연등을 달았다. 말도 못할 만큼의 고생이었다. “캄캄한 밤에 연등이 켜지면 장관이었죠. 힘들었지만 해놓고 보니 뿌듯하더라구요.(웃음).” 팔만대장경 축제는 체력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녹록치 않았지만 청년정신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1994년부터 5월 부처님오신날까지 일주일간 진행된 팔만대장경 축제에는 인경, 서각 체험프로그램부터 먹을거리와 가수초청 행사까지 진행되었다. 향우회원들의 인맥으로 초청가수를 섭외하였는데 그중 가수 김종국이 처남인지라 거금이 들어가는 섭외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두 해에 걸쳐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대출을 갚지 못해 몇몇의 회원들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었고 겨우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네 다섯 해에 걸쳐 진행된 팔만대장경 축제는 결국 자금난으로 인해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지나고 보니 해인사가 주최한 팔만대장경 축전이 전 국민의 축제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민병문 님의 택시를 타면 가는 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끝맺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내리게 된다. 가야산골 구불구불한 길 위에 이야기들이 녹아들어 덧입혀진다. 길은 시간과 사람들의 추억을 입는다. 그렇게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누군가의 기억에 바람결처럼 스치며 갖가지 모습으로 소리를 내겠지. 사월. 바람결에 벚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순간에도, 꽃 진 자리에 꽃받침이 지키고 있을 때에도, 그 어느 순간인들 흐르지 않은 순간이 있었으랴. 홍류동의 바위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물길의 다양한 흐름이 있지만 그 흐름이 멈추진 않는다. 때가 되면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짙어지다가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