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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촌 민병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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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2015년 04월 398호
가야산 깊은 골을 타고 온 바람이 거세게 흐른다. 나뭇가지를 만나면 세차게 훑기도 하고, 채 바스라지지 못한 낙엽들이 제 몸 구르며 내는 마른 소리도 들리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의 갖가지 소리들도 들려온다. 해인사에도 이렇게 꽃샘추위가 지나가나 보다. 이윽고 그러한 소리들이 잦아들면 제 할 일하는 새들의 부지런한 지저귐들과 햇살에 부화한 꽃망울들이 톡톡 터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리 피어선 꽃들이 길을 밝히면 마치 기다란 제등행렬의 마중을 보는 것 같다. 이십여 년 전의 어느 봄날을 거슬러 오르면 그곳에는 해인사가 있다. 가야산골 청년들이 밝힌 등불이 지금도 꺼질 줄을 모른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길 위에 되살아 날테니 말이다. 사하촌에서 삼대三代를 이어 뿌리내려 살아가는 민병문 님이 풀어내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 추억이 따땃한 봄날처럼 푸근해진다.

해인지를 품고 달리는 택시
가야산골을 누비는 어느 택시에는 해인지가 있다. 손님을 배려한 듯 해인지 두 권이 친절한듯 꽂혀 있다. “그 달 해인지 받으면 두 권은 뒷자리에 꼭 꽂아두죠. 해인지는 해인사의 이미지잖아요. 그러면 손님들은 꼭 펼쳐 보시더라구요” 그래서 민병문 님은 월간해인의 영구회원임을 자부하시며 <해인>과의 인연담을 들려주신다. <해인>은 1980년대 불교학생회와 해인사 스님들을 위한 자그마한 포교지로 문을 열고 그렇게 시작된 월간 <해인>이 통권 400호를 바라본다. 시대의식에 펜을 담그고 그 시대의 공감이 여울목처럼 펼쳐졌던 장이 <해인>이었다. 작은 물길들이 모이고 모여 때론 소용돌이처럼 센 물살을 만들어가면서도 청년정신을 담은 <해인>은 그렇게 나아갔다. <해인>이 그러한 청년정신을 품을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들의 맑은 열정으로 피워낸 것이었으리라.
당시 해인사 불교학생회에서 수년간 열의를 다해 지도해 주셨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존경을 담아 항상 빠뜨리지 않으신다. 당시 불교학생회는 지도법사였던 현응 스님(지금은 총무원 교육국장이신)과 야로고등학교 교사였던 황희연 선생님께서 끌어주셨다. 특히 황희연 선생님께서 주도로 만들어진 4쪽짜리 <해인>은 지금 월간 해인의 모태였다고 하셨다. 은사님의 그런 열의를 지켜본 제자로서 <해인>이 더욱 친근하다 하셨다. 민병문 님과의 인터뷰 약속이 예정된 시간 즈음 통화를 끝내고 편집실에 들어오셨다. 은사님과의 통화였다고 했다. 인터뷰 요청을 받고보니 은사님의 고마움과 그리움이 간절해져서 전화를 드려보았다 하셨다. 본인 일처럼 함께 기뻐하시며 당시 해인사 학생회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해인사학생회가 1979년 부처님오신날 해인사에서 연극을 올린 작품인 ‘백치 아다다’로 당시에도 유명했던 개천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했다. 연극의 기본기도 없었을 산골의 아이들을 지도해 주신 은사님의 노고덕분이 아니었겠느냐며 본인의 일처럼 좋아하셨다. 그 이후 연극에 참가한 학생 몇 명은 연극영화학과에 특채로 들어가고, 은사님도 공중파 방송국에서 방송작가 제의도 들어올 만큼 당시의 큰 화제였다고 한다. 택시를 탔을 때까지 해서 세 번째 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신나신 듯, 즐거우신 듯, 구수하게 말씀하신다.

14km 피어난 연등
굳이 ‘불교’라고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을청년회가 불교청년회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한다. 이십여 년 전, 당시 민병문 님이 청년회 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숭산청년회, 가야청년회, 해인사청년회의 회원들이 해인사와 지역을 위해 할 일을 모색하다가 팔만대장경 축제를 기획하고 추진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금을 모으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각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받기도 하며 다녔지만 여전히 기금은 부족했다. 논의 끝에 청년회장이 보증을 서고 대출을 받아 진행했다고 했다. 해인사의 상징을 찾다가 야로에서 해인사까지 장장 14km 길에 청년회원들이 참여하여 손수 연등을 달았다. 말도 못할 만큼의 고생이었다. “캄캄한 밤에 연등이 켜지면 장관이었죠. 힘들었지만 해놓고 보니 뿌듯하더라구요.(웃음).” 팔만대장경 축제는 체력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녹록치 않았지만 청년정신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1994년부터 5월 부처님오신날까지 일주일간 진행된 팔만대장경 축제에는 인경, 서각 체험프로그램부터 먹을거리와 가수초청 행사까지 진행되었다. 향우회원들의 인맥으로 초청가수를 섭외하였는데 그중 가수 김종국이 처남인지라 거금이 들어가는 섭외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두 해에 걸쳐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대출을 갚지 못해 몇몇의 회원들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었고 겨우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네 다섯 해에 걸쳐 진행된 팔만대장경 축제는 결국 자금난으로 인해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지나고 보니 해인사가 주최한 팔만대장경 축전이 전 국민의 축제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민병문 님의 택시를 타면 가는 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끝맺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내리게 된다. 가야산골 구불구불한 길 위에 이야기들이 녹아들어 덧입혀진다. 길은 시간과 사람들의 추억을 입는다. 그렇게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누군가의 기억에 바람결처럼 스치며 갖가지 모습으로 소리를 내겠지. 사월. 바람결에 벚꽃이 비처럼 흩날리는 순간에도, 꽃 진 자리에 꽃받침이 지키고 있을 때에도, 그 어느 순간인들 흐르지 않은 순간이 있었으랴. 홍류동의 바위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물길의 다양한 흐름이 있지만 그 흐름이 멈추진 않는다. 때가 되면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짙어지다가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