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대장경세계문화축전 준비기간에 경남도지사가 해인사를 방문하였다. 축전의 준비상태와 해인사와의 협조관계를 설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담당국장스님들이 일주문으로 마중을 나갔고 도지사는 일주문에서 내려 해인사로 올라온다. 그러면 늘 법당이나 주지스님 처소보다 우선 방문하는 곳이 기와접수처이다. 가장 먼저 접하기도 하거니와 기와접수가 방명록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선 기와접수처에 가서 방문목적과 이름을 기와에 적어 넣는다.
1 김굉金硡은 1523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우암이 쓴 둔세시 옆과 절승대 두 곳에 새겨있다.
2 파성坡城 윤인경尹仁鏡은 발견된 석문 인물 중 오래된 인물로 1540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홍류동 환선대에 새겨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조형미가 가장 아름다울 석문으로 추정된다.
3 허엽은 157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홍제암 사명대사 비문과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이다. 허석과 함께 나란히 쓰여 있다.
4 홍우녕洪禹寧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1714년 갑오년 가을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5 오명항吳命恒은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최치원의 둔세시가 적혀있는 치원대 아랫방향에 있다.
6 홍우전洪禹傳은 신축辛丑1721(영조4)년 경상도관찰사가 된 인물이다.
신축이란 기록이 있어 관찰사로 부임한 1721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홍류동 벽에 새겨있다.
7 오명서吳命瑞는 1728 ~ 1731년(영조 7)에 합천군수를 역임했고, 1735년에 경상도관찰사, 병조·예조의 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유일하게 합천군수가 경상도관찰사가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8 민응수閔應洙는 1736년 경상도관찰사觀察使겸 대구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로 있었으며 대구읍성大丘邑城의 축조를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9 이격李格(1682 ~ 1759년)은 1735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10 이성망聖望 계해하추과癸亥夏追過(1683)
1709년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계해하추과癸亥夏追過란 기록이 있어 1683년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11 미중美仲 정하언鄭夏彦 1742년 경상도관찰사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 · 옥호자玉壺子.
1735년(영조 11)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2년 경상도도사 시절 진휼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발되어 경상도의 양곡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감진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와의 의견상충으로 삭직되었다.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다시 기용되고, 1744년 조정에서 『속대전』을 찬수할 때 왕의 특명으로 찬집랑纂輯郎에 보임되어 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후 정언·장령을 역임하고 1747년 의주부윤으로 나갔으며, 좌부승지에 이어 1763년 병조참의에 오르고 대사간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예·글씨에도 능하였는데, 조구명趙龜命(홍류동에 이름이 새겨있다)이 그의 글을 읽고 “《소동파집蘇東坡集》에 실려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찬탄하였고, 경연經筵에서도 재량 있는 말로 왕의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액額을 썼다.
합천군수를 지낸 그의 아들 정간, 정주와 함께 새겨있다.
12 남태량南泰良은 1747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대동휘찬을 편찬하였다. 《대동휘찬》은 조선 태조(1335-1408)부터 숙종(1661-1720)까지 역대 군주와 명사名士의 사적事蹟, 조정의 제도 등을 엮은 책이다. 그의 자손으로 보이는 남문로와 남혜로가 함께 취적봉에 새겨있다.
남혜로南惠老 자字사양士養 임술壬戌題1742
13 이유신李裕身은 1757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낙화담 절벽과 홍류동 환선대에 그의 아버지 이준상과 이름을 함께 남겼다.
이유신李裕身 父 이준상李寯相 이택신李澤身
14 조엄趙曮은 1758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회선암에 이름을 남겼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1758년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 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조돈趙暾은 1768년 경상감사를 지냈다.
1761년에 순흥부사에 특보(特補)되고 개성유수를 역임했는데, 공무를 처리하는 데 확실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침착하고 현명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1768년 경상감사를 거쳐 이조판서로서 유가를 청했으나 자중할 것을 명받은 뒤에 귀향길을 찾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제천현에 부처(付處)되었다. 그 뒤 판윤을 거쳐 1771년에 나이가 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걸해(乞骸 : 나이 많은 관료가 벼슬길에서 물러날 것을 아룀)를 청하자 영조가 비로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하고 ‘경심금수여의창연卿心今遂予意悵然 : 경의 마음은 지금 홀가분 할 지는 모르나 짐의 뜻은 실망스럽구나)’이라는 8자를 친히 지어 하사함으로써 벼슬길에 물러날 것을 허락받고 양주 천죽리(川竹里)에 퇴거하였다.
두 동생 조엄(趙曮)과 조정 모두 현달(縣達)하였다.
15 이미李彌는 1769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홍류동 석주 뒤편 암벽에 이름을 남겼다. 아마도 홍류동 계곡을 통털어 가장 크고 아름다운 글씨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