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로1)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사 향기 - 김윤선┃서울거주 2015년 04월 398호

해인사가 품 안에 안을 정도가 된다면, 한 번 해인사를 안고 싶다. 해인사에서 만난 모든 사람은 나의 스승이었다. 해인사가 아니었다면 봄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로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6년 전, 나는 나목裸木이었다. 까딱하면 고목枯木이 되기 십상인, 그렇게 위태로웠다. 그 이유는 삶을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여행을 통해 자신감이 넘쳤고, 눈부신 미래를 상상하며 지냈었다. 하루하루 설레었다. 그러나 취업을 하고, 목과 어깨에 통증이 찾아왔다. 수많은 병원, 민간요법 등 여기저기 전전하며 삶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살았지만, 주어진 건 아픔뿐이란 생각에 절망했다. 급기야 수많은 잘못들을 찾아 과거로 끊임없이 회귀했다. 매일 피아노를 치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는 울적한 마음에 경주여행을 계획했다. 검색 중 우연히 해인사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경주 말고 수련회에 갔다. 간다고 뭐 달라지겠나, 싶어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묵언을 하며 내 안을 들여다볼수록 괴로웠다. 잠도 잘 수 없었다. 1080배 할 때는 무슨 죄를 지어 이러고 있나 싶었고, <부모은중경> 독송 할 때는 눈물만 났다. 일정이 진행될수록 오만가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알았다. ‘자기 삶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죄다.’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됐다. 잘못해서가 아니라 누구든 아플 수 있어.’ 다시 살고 싶었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습의사 스님들께서는 원칙과 열정으로 지도해주셨다. 지금도 절에서 어떤 행동을 할 때면, 스님들의 말씀이 귓가에 들린다. 분명 드림팀이었다.
집에 와 2주를 보내고, 아직 다 찾지 못한 것들을 찾으러 또 해인사에 갔다. 엄마는 카메라를 사주며, 앞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라 하셨다. 가서는 설거지, 이불빨래, 화장실 청소 등을 했다. 집에서는 하지 않던 일들이었는데, 다 재미있었다. 집안 일이 즐겁다는 걸 처음 느꼈다. 사진수업도 했다. 빛을 이해하려면 벌브2) 사진을 찍어야한다고 새벽에 소집하기도 하고, 그 밖의 무리한 계획을 짜고는 지키지 않았다며 화도 냈다. 부끄러운 일이 많았지만 즐거웠다. 해인사의 모든 게 좋았다. 자원봉사와 사진수업은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 느끼게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집에 왔다. 진로를 고민하다 글로 등단하겠다 마음을 먹고 다시 해인사에 갔다. 집에 오면 늘 해인사에 갈 이유를 만들었다. 이번엔 후원에서 일했다. 일보다 봉사자들이 힘들었다. 자원봉사 반장 소임이 주어졌는데, 다들 내가 일을 시키기만 한다고 불만이 많았다. 말하기 싫어 마스크를 쓰기도 하고, 그들의 성만 묻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김보살, 박처사’ 이런 식으로 불렀다. 마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일이 잘 될 리 없었다. 사람들이 쉴 때, 혼자 일기장과 메모장을 들고 보경당에 갔다. 정작 글은 안 쓰고 일기만 썼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른 채 답답해했다.
그러던 중, 한 보살이 왔다. 나는 성만을 물었지만, 그 친구는 내 이름을 물었다. 그 아이는 밤마다 내 잠꼬대를 들었다. 잠꼬대는 ‘바닥을 닦읍시다. 설거지를 합시다’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흔들어 깨워서, ‘일하는 꿈 말고, 제발 노는 꿈꿔라’ 했다. 잠꼬대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시키는 대로 다할게. 참지 말고 다 말해.”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했다. 1시간 넘게 걸리던 일이 30분에 끝났다. 마음이 맞으면 일은 쉬웠다. 문제는 나였다. 사람을 분별하고 마음을 열지 않아 힘든 거였다. 이제 서로가 얼마나 닮았는지 보였다. 우리는 모두 겨울나무들이었다. 겉이 앙상한, 허나 속에는 꽃 피우고 싶은 마음을 가진. 온몸으로 나무가 되기 위해 온 거였다. 가장 대립했던 하언니는 위기마다 날 지켜주었고, 진정한 도반이 되었다. 관계가 돈독해지고, 후원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가족. 집에 전화도 거의 안했고, 어쩌다 통화하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말했다. 그러다 장주스님을 뵈었다. ‘봉사하며 무얼 느꼈느냐?’ 한마디 하셨는데, 모든 게 스쳐갔다. 해인사에서 당당하게 지냈다고 여겼는데, 그간의 오만한 행동들과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에 부끄러웠다. 문밖으로 나가기조차 힘들었다. 그날, 법당에 가서 많이도 울었다. 부모님께 가서 잘못을 빌어야했다. 황급히 해인사를 나오며, 당황한 하언니에게 솔직히 말했다. 내가 죽으려했다고.
막차를 탔고, 대구에서 윤숙이를 만났다. 후원에서 단 하루 함께했을 뿐인데, 그녀에게도 다 털어놓았다. “너 많이 힘들었구나.” 어쩌면 내가 정말 힘들었다고, 그 한마디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해인사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해인사에서 보내는 기간이 점점 줄었다. 이전까지는 해인사에서 할 일을 찾아다녔으나, 이제는 서 있는 곳에서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법보전 주련에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라 하였으니, 역시 해인사는 옳다.
해인사에서 만난, 103명의 사람을 기억한다. 대화를 해본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다. 다들 기억한다. 꽃이 진다고 그대들을 잊은 적 없다. 해인사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해왔고, 무엇을 가졌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했다. 나와의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했고,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었다.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려주었다. 가족처럼 말이다. 가족을 자부하는 만큼 해인사와 해인사 사람들을 자부한다. 해인사는 내가 있건 없건 잘 흘러가겠지만 혹 나를 필요로 하는 때가 온다면 해인사에 있을 것이다.
장주스님께 말씀을 올리고 싶다. 장주스님~ 지금보다 조금 덜 아프시고, 웃는 일은 조금 더 늘어나,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해주신 귀한 말씀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실천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
1)황지우,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민음사, 1985.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목을 지었음.
2)사진기의 노출 시간을 장시간으로 유지시키는 셔터 속도의 일종. 셔터를 누르고 있는 동안 노출이 지속된다. 영어의 첫 글자를 따서 B셔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2015. 3. 20.(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19389&cid=50324&categoryId=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