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그 뜨거웠던 여름날!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김원해┃배우 2015년 03월 397호
김원해님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5년간의 긴 무명생활을 끝내고 지금은 TV와 영화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4년 영화‘명량’,‘해적 바다로 간 산적’,‘타짜2’ 등으로 3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작년한 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배우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를 종종 따라다니곤 했다. 군것질이 흔하지 않던 시절, 교회를 가면 사탕이며 과자며 당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울 엄마는 천주교 신부님 댁에 파출부 일을 다니시며 아주 가끔 성당을 나가시곤 했다.
그렇게 불교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나의 삶에 불교는 아주 우연히 찾아와 주었다.
1985년 그 뜨거웠던 여름 날!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전국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수업과 공부는 뒷전으로 미룬 채 양철지붕으로 뒤덮인 학교 강당에서 연극연습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500번은 외웠을 연극대사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있었다. 평화롭던 학교와는 대조적으로 창문 너머 담벼락 밖에선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는 대학생 형, 누나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더위에 못 이겨 창문을 조금이라도 열라치면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유입 되어 이미 땀범벅이 된 우리들을 눈물과 콧물의 범벅으로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었다.

우리가 준비하던 공연은 고등학교 창작극인‘양반전’이라는 연극이었는데 극중에 스님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무리 수소문을 하여도 승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연극공연을 1주일 정도 남겨 놓고도 승복을 구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우리들은 리허설을 하기 위해 방문한 서울예전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소변이 급했던 나는 방광이 터지기 직전 화장실에서 아!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스님 한 분이 소변을 보시는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아니 예술대학에 웬 스님? 여기가 동국대학교도 아닌데’
이런저런 경황을 따질 사이도 없이 스님과 나란히 서서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던 나는 다짜고짜 스님에게 물었다.
“저기요 스님, 저희가 연극을 하려 하는데 승복이 한 벌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요. 승복을 좀 빌려 주심 안 될까요?”그러자 스님께서 천천히 털꺼 다 터시고 차근차근 뒷정리를 하신 후 본인을 지웅 스님이라 소개하시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벗어줄 순 없으니 내가 있는 절로 찾아오세요”
당시 지웅 스님은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절이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에 위치한‘석왕사’였다.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연극에 필요한 의상 한 벌로 인해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처음 가본 절이라는 곳은 신기 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설렘 그 자체였다. 엄숙하고 웅장하리라 기대하고 갔던 석왕사는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할머니들이나 오셔서 절이나 하는 곳이라 생각했던 절은 젊은이들이 바글거렸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너른 마당을 지나 한쪽 구석에 허름한 청년회관이 있었고 그곳에선 학생회와 청년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부천을 중심으로 젊은 청춘들의 요람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대학생 형, 누나들은 야학을 개설해 소외된 지역노동자들과 세상의 균형과 평등에 대해 토론하였고 다른 한쪽에선 문화패 형들이 사물놀이와 탈춤을 추며 당시 전두환 정권에 풍자로 항거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데가 있다니, 배우를 꿈꾸던 나에게 당시 석왕사는 놀이터였고 훌륭한 연기학원이었다. 그날로 짐을 싸서 석왕사로 쳐들어 갔고 거기서 원 없이 연극연습을 했고 사물놀이의 매력에 푹 빠져 장구와 꽹가리를 매일 두들겨 댔다. 그때 배운 사물놀이 장단은 훗날 내가‘난타’를 하면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임영담 주지스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무작정 짐을 싸서 주지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 여기서 학교 다니면 안 될까요?”
그러자 영담 주지스님께선“절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 인연은 니가 만드는 것이고 니 밥값도 니가 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대충 있어도 된다는 것 같았다. 초파일엔 연등을 달고 동지엔 팥죽을 쒀가며 석왕사에서의 하루하루는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고3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고 서울예전 진학이 코앞이던 찰나 가정형편과 집안의 반대로 배우의 꿈을 포기하려 할 때 영담 주지스님께서 형편 때문에 꿈을 포기하진 마라시며 대학졸업 때까지 학비를 지원해 주셨다. 스님 덕분에 무사히 서울예전 연극과를 졸업하고 기나긴 무명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감사함을 뒤로 한 채‘유명한 배우로 성공해서 꼭 찾아 뵈어야지, 내년엔 꼭 찾아 뵈어야지.’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내 나이 어느덧 47세가 되었다. 내 평생의 은인이신 영담 스님께 너무 많은 불효를 저절렀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그리고 아직 많이 유명하진 않지만 지금이라도 용기 내서 꼭 찾아 뵈어야겠다.
스님!!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